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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영광과 평화(누가복음 2:8-14) 조회수 : 1986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6-12-29
  첨부파일:   2006년 성탄예배 메시지.hwp(66K)
20061225 성탄예배 메시지
영광과 평화(누가복음 2:8-14)

<본문>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메시지>
1. 하나의 차이
1) 일반적인 생각
어떤 여론 단체에서 교회 다니는 270명의 학생들에게 여론조사를 했는데, 60%정도가 크리스마스트리, 캐롤송이 생각났다고 한다. 20%정도가 교회나 그리스도가 생각났다고 한다. 그러면 학생들 중에서는 한 1/4정도만 성탄절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말이고 나머지는 사실 성탄절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말이된다.
제가 보고 있는 신문에 보니까 천주교 추기경이 성탄절을 맞아 조계사 절에서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 복지시설을 방문을 했다. 왜냐면, 지난 석가탄신일 때, 조계종의 종무 원장님께서 천주교의 장애인 복지시설을 방문해서 위로했다고 해서 답방을 한 것이다. 그래서 조계종의 절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어 있고 성탄을 축하한다는 플랜카드가 붙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천주교의 대표적인 추기경과 절의 대표적인 종무 원장이 얘기를 하는 중에 부처님도 사랑이고 예수님도 사랑이니까 다 똑같은 것 아니냐고 서로 덕담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문기자는 무슨 얘기를 하냐면 결국은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진리는 보편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결론을 맺었다고 한다. 이것이 무식한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고 지성적인 사람,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요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판단이 되어졌다.
2) 하나의 차이
과학 잡지에 보면 침팬지와 인간을 비교하는 보고서가 나온적이 있다.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 인자가 98.99%가 같다고 한다. 그러니까 거의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과학자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면 침팬지와 인간이 정말 그렇게 같다면 결혼해서 아기를 낳을 수 있겠네요?” 예를 들자면 말과 당나귀와 서로 비슷하니까 교배를 한다면 노새가 나오듯이 침팬지와 인간이 비슷한 무엇인가가 나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과학자들이 그 말을 듣고 연구를 했다고 한다. 인간과 침팬지의 정자와 난자가 서로 교배를 하게 되면 서로 몰라본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배가 되지 않고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은 비슷한데 다른 것이다.
미국 텍사스 주에 희한한 침팬지가 있는데, 사람과 거의 똑같다고 한다. 걸어다니고, 침팬지가 제일 좋아하는 맥주를 제일 잘 마신다고 하고, 텔레비전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미국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맥주와 텔레비전을 좋아하는데, 그러면 인간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해서 과학자들이 연구를 한 것이다. 혹시 저 침팬지가 사람과 침팬지와 교배해서 태어난 중간상태가 아닌가? 하고 연구를 해보니까 저 침팬지가 사람이 아니고 영락없는 침팬지라는 것이다. 이게 사람과 침팬지가 거의 비슷한데 1%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몇 년 전에 케냐에 갔다. 거기 선교사님이 마사이족이 사는 지역을 안내를 해서 가 보았다. 그런데 사는 모습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이 안 가더라. 그런데 조금 지나다 보니까 어떤 젊은 마사이족이 우리를 향해서 얘기하는데, 그 사람이 들고 다니는 어떤 것(테이프)을 트는 것이다. 한국말이 나오고 영어가 나오고 마사이족이 쓰는 스와힐리어가 나온다. 그런데 목소리가 류광수 목사님 소리더라. 류목사님 설교를 영어로 통역하고 그 언어를 스와힐리어로 통역하더라.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들었는데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웽~, 웽, 웽~ 하면서 들리더라. 그러면서 우리보고 같다고 말한다. “당신도 다락방이지! 나도 다락방이다!”그 말이다. 당신들이 듣는 류목사님 메시지 나도 듣는다! 그 말이다. 그래서 제가 저 맛사이 족도 사람이구나! 그것을 알았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가는데도 아, 분명히 저 사람들도 구원받은 사람이구나! 그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에 침팬지와 우리 인간이 비슷하다고 하면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아들과 딸이 있다면 예쁜 침팬지를 며느리로 삼든지 사위로 삼든지 해야 될 것 아닌가? 그런데 비슷하다고 말한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한번도 내 아들을 아주 예쁜 침팬지 며느리로 삼겠다든지, 아주 멋있고 힘센 침팬지를 내 사위로 맞이하겠다. 그런 사람들을 아직도 들어본 적이 없다. 혹시 그런 사람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왜냐면 앞으로 정신병이 생기니까 정신병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과 침팬지와는 비슷하지만 하나의 차이가 있다. 유전인자가 100% 같다고 하더라도 짐승과 다른 것이 우리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다. 이것이 우리 인간과 짐승과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다윗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이 힘을 얻는도다!” 이런 말을 계속 한다. 다윗은 곧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혼이 힘을 얻어야 된다는 말이다. 신약의 벧후 1:9에 보면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이라.”고 했다. 요삼 1:2 에 사도요한이 아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네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되어야만 범사가 잘되고 영혼이 잘되어야만 강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잘못된 상태에서도 아무리 육신적으로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것이다.
3) 하나님과 인간
그렇다면 사람과 하나님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요, 하나님의 모습을 많이 닮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갖고 있는 사랑, 감정들을 우리 인간들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영원하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다. 전능하지 않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절대적이시다. 그런데 사단이 자꾸만 우리 인간을 속여서 우리 인간을 하나님과 같다고 속이는 것 아닌가? 사람은 절대 하나님과 같지 않다.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냐면 황진이라는 드라마를 보니까 임금의 총애를 받는 예판이라는 장관이 황진이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그 장관직을 버리고 황진이랑 둘이 도망가서 3년동안 살다가 잡혔다. 그래서 예판대감이 죽을 뻔 한다. 그것을 보며 사람들이 저런 사랑을 원하는구나! 정말 우리가 사랑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후회한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사랑해도 사람은 구원자가 아니다. 정말 나를 위해서 생명도 주어지고 관직을 다 버리고 한 여인을 택하는 그런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구원자가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 74:12에 “여호와는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고 우리는 구원 받을 자란 말이다. 그게 다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과 같다고 생각한다. 같은 면이 있지만 또 다르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산다. 그리고 우리는 인제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모습들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이제 하나님처럼 하나님이 갖고 있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말이다.

2. 성탄의 축복
1) 너희를 위하여
11절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너희를 위하여 오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망하지 말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독생자 예수라는 말이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사건이다.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게 성탄절이다. 성탄절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물론 필요하다. 서로 카드를 주고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날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와야만 하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영원한 저주 가운데 가야 되기 때문이다. ‘너희 아비 마귀’에게 잡혀서 끌려다니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빠져 나오라고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는 말이다.
2) 하나님께 영광
(1)에덴 동산
14절에 보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했다. 성탄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 하나님을 최고의 고귀한 상태로 높여 드리는 것을 영광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그러면 왜 독생자가 오셔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가장 행복한 상태로 살 수 있도록 에덴동산을 창조하셨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와 하나님과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의 공동체였다. 하나님이 언제든지 아담과 하와를 부르시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언제든지 부르는 아무 거리낌 없는 상태였다. 그것이 천국의 모형이었다.
(2)사단의 속임수
그런데 사단이 뱀의 형상을 가지고 나타나서 아담과 하와를 속인 것이다. 하와야, 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 따먹어도 된다고 속인 것이다. 그것 먹으면 네가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솔깃해져서 그 말을 계속 생각하다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영광의 관계가 깨어져버렸다.
인간은 창세기 3장에 걸려져버린 이후로부터 인간은 계속해서 이런 유혹을 받고 있다. 창 11:4에 보면 사람들이 성을 높이 쌓아서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고 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같이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바벨탑이 무너지게 되지 않는가?
(3)하나님께 영광
그러면 영광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사단에게서 빼앗겨버려서 하나님을 높여드리지 못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영광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길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방법 밖엔 없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없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3) 사람들 중에 평화
(1)한몸의 축복
그런데 또 한가지는 14절에 보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중에 평화로다.” 원래 아담과 하와의 원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뼈중의 뼈요 살중에 살이로다. 그래서 한 몸을 이루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영광의 관계가 깨져버리니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2)깨어진 관계
사람이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로다. 할 때는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어그러지지 시작하면 모든 것이 문제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그랬거든요. 이전 같으면 아담이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할텐데,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았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아이들을 기를 때, 엄마가 아이들을 부르면 정상적인 아이는 엄마! 하고 달려든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 애는 숨는다. 왜? 뭔가 일을 저질러놓아서 엄마가 부르면 자기를 혼낼 줄 알고 숨는다고 생각하여서 숨는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숨어서 하나님을 숨길려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웃깁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었다. “어떻게 선악과를 먹었냐?” 그런데 아담이 하와와 한 몸 상태 같으면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남편상태에서 남편구실을 잘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될 텐데, 아담이 “하나님께서 내게 준 저 여자...” 여기에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말은 은근히 하나님이 원망스럽다는 말이다. 사람이 꼭 무엇을 비난할 때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비난하지 않는다. 누구 때문에, 부모 때문에, 핑계를 댄다. 그러면서 저 여자 때문에... 하면서 핑계를 대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간에 안 통한다는 것이다. 한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 따로 나 따로인 것이다. 그러니 평화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또 두 사람이 아이를 낳았다. 큰 아들은 가인이고 둘째는 아벨이다. 그런데 부전자전으로 두 아들 간에 갈등이 생기니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면 될텐데,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예배는 받고 가인의 예배는 안받으니까 가인이 화가 나고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생겨서 동생 아벨을 돌로 찍어서 죽였다. 이게 평화가 아니요 저주라는 말이다. 사람과 관계가 깨어져 버리니까 자손들의 관계도 깨어버렸다. 이게 저주다. 땅이 저주 받고 뭐가 저주 받는 것도 저주지만 한 몸 상태가 깨어져버린 것도 저주인 것이다.
(3)사람들 중에 평화
이렇게 깨어져버린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다. 여기 말한 대로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했다. 깨어진 상태가 회복이 되었을 때 평화가 있지 깨어진 상태에서 무슨 평화가 있는 것인가? 평화가 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정말 사랑을 받고 있고 우리가 한 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질 때 평화가 있는 것이지 니 따로 나 따로 하는데 무슨 평화가 있는가? 그것은 평화가 없는 것이지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성탄의 축복이다.

3. 쓰임 받는자
1) 온 백성에게
성탄의 축복을 누가 누려야 되겠는가? 10절에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여기 성탄의 축복은 온 백성이 다 들어야 될 말씀이다. 성탄의 축복은 모든 백성이 같이 다 누려야 된다.
딤전 2:4절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길 원한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성탄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다 들어야 된다는 말이다. 이게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러면 누구를 들어야 되겠는가? 성탄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를 들어야지 본질이 아닌 크리스마스트리를 듣고, 캐롤송을 듣고, 선물을 듣고 하면 잘못된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로 그리스도가 오셨다.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유일한 이름 그리스도로 오셨다. 그래서 어제 말씀한 것처럼 애굽에서 노예생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쓰고 바르게 살아도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 빠져나왔다. 어린양의 피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부를 때 해결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영원히 듣고, 누리고 후대들에게 이 사실을 영원한 규례로 정해서 전해야 된단 말이다. 성탄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자꾸만 사람들이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꾸만 다른데 가려고 하는 것이다. 속고 있는 것이다. 성탄의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깨어진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받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나와 함께 하시고 다스림 받고 인도받으면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성탄의 축복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하나님 앞에 예배가 되어지고 하나님과 교제가 되어진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평안이 있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회복되어진다. 깨어지는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성탄이다.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소중한 것이지만,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영원한 그리스도! 그 분만이 영원하시다.
2) 다윗의 동네
그러면, 11절에 보니까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다윗의 동네가 어딘가? 4절을 보면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 라고 했다.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 가면 베들레헴이라는 동네가 있다. 바로 예수가 베들레헴 땅에 났다.
언제 때어났냐? 눅 2:1-2에 보면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셨으니 그 호적은 구레네오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첫 번 한 것이라.” 로마의 황제 이름 가이사 아구스도가 있고 구레네오라는 수리아 총독이 있는 그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로 말하면 우리나라 노무현 대통령 있을 시절에, 강원도 지사인 김 아무개지사 시절에 우리가 속초 하나로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역사적인 분명한 시간 장소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오셨다는 말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 영으로 오셔서 우리가 그 예수를 지금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셔서 내 삶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한 시간표 속에 구체적인 장소가 있는 그 지역에 오셨다. 지금도 주님은 내 삶의 현장에 우리 가정 현장에 찾아오셨다. 그래서 그 분을 모시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다. 이게 역사적인 구체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오셨는가?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깨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3) 쓰임 받는자
(1)천사의 활동
그런데 이것을 전달하는 일이 일어났다. 9절에 보니까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시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절에 보니까 천사가 이르되... 여기 천사가 나와서 이 얘기를 지금 목자들에게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여기 보면 천군이 나오고 천사가 나온다.
저는 옛날에 천사를 동화책에서 봤는데, 천사는 날개가 달렸더라.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천사가 날개 달렸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천사의 존재를 설명하느라고 동화작가들이 날개를 그렸구나! 그렇게 알았다.
여러분, 천사는 영적존재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영이 눈에 보이는 것은 잘못 본것이다. 천사가 타락해서 사탄이 되었다. 그러면 분명히 영적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복음 전도하는 현장에서 보면 불신자들 중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 봤어?”, “하나님 보여줘!” 그런다. 그 때, 류 목사님이 그랬다고 한다. “그러면, 선생님은 정신 있어요?” 물어보니까 그 분이 화를 낸 것이 아니고 “야 이놈아, 정신없는 놈이 어디있냐?” 그러더라. 그래서 “정신 좀 보여주세요.” 그랬더니. 정신이 있긴 있는데 어디에 보여줄 수 있는가? 눈에 있는가? 귀에 있는가? 머리에 있는가? 그런데 정신이 분명이 있기 때문에 정신병 환자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정신병 환자가 굉장히 많다. 그런데 정신이 어디 있는가? 보이지는 않는데, 실제하지 않은가?
보이면 차라리 좋을텐데, 만약에 손가락에 문제가 있어서 정 하다가 안되면 안타깝지만 손가락을 잘라버리면 되는데, 손가락을 잘라도 안되고...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영적존재는 눈에 안 보이지만 실재한다. 천사는 결국 하나님의 심부름 하는 영인 것을 가르킨다. 천사가 타락해서 사단이 되고 귀신이 되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어떻든지 여기에 나온 천사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사람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남을 가르쳐준 천사들이다.
(2)목자들의 활동
8절에 보니까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킬 때에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얘기를 했다. 이 말을 다 듣고 15절에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그랬다. 목자들이 축복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천사들을 통해서 들은 말들을 빨리 가서 확인해보고 자기들이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더니
18절에는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사람들은 다들 기이히 여겼는데, 마리아는 알았다. 자기 몸에 잉태된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알았고, 이 분이 구세주라는 것을 마리아가 알았기 때문에 마음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누가 전했는가? 목자들이 전했다.
20절에 보면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회복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로 말하면 예배와 경배의 찬양을 드리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만약의 목자들이 이 말을 듣고 그래, 좋다. 우리끼리 너무너무 좋다 하고 집안에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목자들이 들은 말을 가지고 베들레헴으로 갔고 이 말을 들어야 될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래서 목자들이 축복받은 사람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데, 누구든지 가서 구원 받는 이름을 가르쳐줘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롬 10장에는 “아름답도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그랬다. 이게 목자들이 받은 축복이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성탄의 축복을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되겠습니다.

<말씀정리>
1. 종교와 복음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복음은 생명이다. 생명은 모든 것과 차이가 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에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구원자요 우리 인간은 구원을 받은 자다.
2. 성탄의 축복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날이 성탄이다. 그래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고, 깨어진 평화를 회복시켜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누리는 것이 성탄의 축복이다.
3. 이 축복을 우리 자신이 풍성히 누리고 우리가 사는 현장, 만나는 사람, 구체적인 사람에게 이 성탄의 축복을 전하는 전도자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 이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약기도>
하나님, 이 성탄 축복된 이날, 날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깨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키시고, 세상에 평화를 회복시키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축복을 우리가 풍성히 누리게 하여 주시고 이 축복의 복음 모든 사람이 들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전달자의 사명과 축복을 우리에게 누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자신이 누릴 뿐만 아니라 이 축복된 사실들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에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성탄의 축복들을 전하는 자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깨어진 인간관계 무너진 모든 것이 회복되는 축복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하옵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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