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126 주일강단 메시지
그리스도의 권세(출 10:1-11)
<출 10:1-1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4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로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5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들에 너희를 위하여 자라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6 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비와 네 조상이 세상에 있어 옴으로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
7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고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8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누구뇨
9 모세가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10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11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본문>
1. 변화의 시작
1) 변화의 시작
처음의 출발이 어렵고 미세하지만 처음 출발만 제대로 되어지면 나중에는 엄청난 결과가 온다. 욥 8:7에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처음 시작하는 것은 작은 변화인데, 이 작은 변화가 앞으로 엄청난 일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을 학자들은 나비효과라는 말로 표현한다. 나비의 펄럭임 변화 하나가 태풍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2) 신분의 변화
우리가 하나가 바뀌면 나머지 모든 것이 바뀐다. 문제는 그 하나가 무엇이냐?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가르친다. 요 20:30-31절에 보면 성경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그리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변화가 생명의 변화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신 목적은 하나다. 예수가 누구신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다. 그 이름을 힘입어 우리는 구원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느냐?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 그래서 세상 풍습을 따라 나도 모르게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알던 모르던 흑암의 나라에 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너희아비 마귀’라고 했다. 그래서 그 마귀가 가는 곳 지옥을 가는 것이 세상 사람에서 말하는 운명이요 사주팔자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성경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면서 내 삶을 천국까지 인도하신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있는 신분의 변화이다.
3) 복 있는 사람
① 생명의 축복
신분의 변화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지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가? 쉬운 예로 사람이 결혼하면 애를 낳게 된다. 애를 낳으면 가정의 모든 것이 변한다.
사람이 생명이 들어가면 사람이 바뀐다. 지난주간에 캠프를 했었다. 여기 집사님이 포럼을 했는데, 포럼을 할 때 복음전도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시스템 전도를 깨달았다. 그래서 복음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역사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것이다. 전에도 복음과 전도에 관심이 있었지만 시스템을 몰랐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쉽게 말하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복음전도다. 그래서 가정이란 제도가 필요하다. 그 안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 때문에 가정 분위기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② 복 있는 사람
그래서 생명이 들어간 사람들은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
시 21:1에 다윗이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고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함이라.” 내가 왕 되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왕인 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기뻐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한다. 그것이 복 있는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이 정말 하나님께로 오는 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게 생명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시 111:2에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고백을 한다. 복 있는 사람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은혜가 임해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이게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 예배할 수 있는 축복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영적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그 말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 주신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존재라는 말이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사는 존재다. 그것이 영적 존재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다.
③ 산제사
그런데 사단은 이 예배를 방해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이 어떻게 속이는가? 창3;1-6에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지 않는다.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같이 된다.” 그 말은 곧 “하나님 필요 없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수 있다.” 이렇게 속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예배 축복을 놓치게 되니까 결국 온 것이 창세기 3장입니다. 지금도 똑같이 사단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하나님, 하나님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무슨 하나님이 밥 먹여주냐? 하나님 안 보이는데, 내 힘을 의지하라.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의지해라!”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예배, 그 까짓것 뭐하러드리냐? 늘 예배드리는 것 한 두 번 빠지면 되지... 결혼식도 안 가고, 잔치집도 안 가고, 제사도 안드리고 그래야 되냐?” 이렇게 속인다.
예수님께 사단이 와서 속이는 것이 무엇인가? 마 4장에 보면 돌을 떡이 되게 하라!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결국, 무슨 말을 하는가? 나에게 절하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경배하지 말고 그 영광을 나에게 돌리라. 사단이 하는 짓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배가 모든 축복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의 노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시며, 어느 날 우리가 죽어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해야 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그리스도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이 사실을 계속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천군 천사를 동원하셔서 예배의 축복 누리게 하신다. 비록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예배를 드리면 영적인 힘이 우리에게 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예배를 통하여 영적 분별력이 생기고 하나님의 소원을 깨닫게 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에 방향 맞추어 살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권세
1) 하나님의 계획
① 보이기 위함
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을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지금 바로와 그 신하들이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다.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어떤 계획인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기 위함이라. 곧 불신자들도 다 보고 알 수 있도록 표증을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계속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이 반복이다. 계속해서 보여주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보이시는 것이다.
② 전하기 위함
2절에 보니까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왜 이런 표징을 여러번, 반복해서 행해야 하느냐? 네 아들과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후대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한가지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사건의 반복을 통해서 후대가 잊지 않도록,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이 반복 하는 것이다. 왜 반복하는 것인가? 자꾸 잊어버리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런 표적을 계속 행하는 것인가? 잊어버리지 않도록, 완전히 사상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계획이다.
사람이 한 번 말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10번 말해도 못 듣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1번 말해도 듣는 것처럼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반복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반복이다. 왜? 우리 인간은 창세기 3장사건 이후로 잊어버리게 되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옛것은 잊어버리는 것은 축복이지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놓쳐버리는 것은 저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반복해서 설명하신다.
2) 그리스도의 권세
3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4절에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로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모세가 왕인 바로에게 가서 하는 말이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4절에서는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로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지금 감히 모세가 어떻게 왕에게 네가... 네가... 그렇게 말하는가? 모세가 교만해져서 목에다가 힘 주고 바로왕 앞에서 거드름 핀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다. 모세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냐면, 나는 부족하고 가난하고 나이도 많지만 하나님이 보낸자임을 그가 알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로왕 앞에 가서 말하는 것이다.
마 10:40에 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내가 똑똑하고 잘 났고 훌륭하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으면 나를 영접할 때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다. 모세가 “내가 똑똑했기 때문에 내 말을 들었어요.” 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는 담대하게 전하는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부족하지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권세가 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반석 같은 축복이 임한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천국열쇠가 주어져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것을 모세가 알았다. 그러니까 바로 앞에 가서 말한 것이다.
우리는 사람 앞에 거만하고 자랑할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된다. 나는 부족하지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영으로 계시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꼭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 권세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말은 모세가 바로 왕 앞에 가서 어깨에 힘 주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말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 그랬기 때문에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는 안 된다!” 그 말이다. 그 말은 모세가 안타까우니까 바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훌륭하고 내가 똑똑하다!” 그런 말이 아니다.
3) 심각한 문제
그런데 7절에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고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이 말은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 왕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중 문제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다.
지극히 육신적 문제로 우리가 병이 들면 내가 어떤 병이 들었구나! 내게 이런 부분에 문제가 왔구나! 하는 것을 알면 고칠 수 있다. 의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야 되겠구나! 내가 이런 부분에 약하니까 관리를 잘 해야 되겠구나! 하면 되는데, 죽을병이 들었는데도 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건강하다고 폼 재고 다니는 것만큼 심각한 문제가 없다.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이것이 병중의 병이다.
이 땅의 사람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모르고 안 믿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이것이 원죄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고 대부분 윤리적인 죄만 생각한다. 그러니까 해결책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죄’라고 하면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 그게 심각한 문제다.
분명 사단이 존재해서 사람들을 무너뜨리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후대를 무너뜨리고 예수믿는 사람까지 속이고 있는데 사람들이 사단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 사단이 가장 원하는 것이 ‘자신이 없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요즘 세상에 무슨 사단이 있어...’한다. 그러니까 망하는 것이다.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모르는 것이다 정말 이 땅의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안다면 함부로 살지 않는다.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농담으로 안다. 그러니까 망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옥구경은 둘째 치고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있는 나라들을 한번 구경시켜 줄 필요가 있다. 얼마나 비참한지, 그것보다. 몇 천배, 몇 만배 비참한 곳이 지옥이다. 미련하고 멍청한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른다.
지금 이 애굽 왕이 이 사실을 모른다. 얼마나 망했는지를 모른다. 왜 모르는가? 바로왕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그리고 안 가진 것이 없다. 그러다보니까 자기가 얼마나 망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가지고 있는데, 영적 사실을 모르니까 얼마나 망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4) 해결자
세상에 임금님보다 높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을 모른다. 자기가 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망하는 길로 계속 가고 있다. 어느 정도 망하면 깨달을 수 있겠는가? 16-17절에 보면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서 이르되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하나님여호와와 너희에게 득죄하였으니 청컨대 나의 죄를 이번만 용서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을 내게서 떠나게 하라.”
바로가 자기가 얼마나 망한지를 모르고 떵떵거리며 산다. 그런데 바로 자기에게 재앙이 오게 되니까 해결할 자가 없다. 왕의 권력으로 해결이 안 되니까 모세를 급히 가서 불러서 왕이 모세에게 가서 용서해달라고 한다. 지금 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쉬울 것 없는 왕의 체면이 지금 완전히 밑바닥에 깔렸다.
사람이 겉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 인생의 근본문제가 닥치면 해결책이 없다. 정말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고 죄로 인한 저주는 사람의 힘으로 해결이 안 된다. 영원한 저주가 임하는 지옥의 문제도 해결이 안 된다. 오직 전도자를 통해서만 해결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 바로의 가정의 문제, 애굽 땅의 문제는 모세를 통해서만 해결된다. 하나님이 보낸 자 만이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세가 잘났다는 말인가? 훌륭하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결책을 모세에게 주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요 희생제사이다. 피의제사를 드릴 때만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모세가 살던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가장 귀중하게 쓰셨다. 그 시대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모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지역에서 볼 때 하나님 보실 때 가장 중요하게 쓰는 사람은 저와 여러분이다. 복음 가진 사람 아니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 보실 때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모세처럼 가난하고 나이 많고 힘 없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모든 일을 다 하셨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로 언약가진 복음가진 생명가진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이 지역의 사람들을 살리신다. 이 지역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것을 우리는 꼭 알아야 된다.
3. 풍성한 생명
지난주 캠프를 하면서 강사목사님과 몇 분 목사님과 설악산 비선대를 갔다. 거의 다 올라가는데 예배당 높이만한 큰 바위가 물가 위에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에 소나무가 심겨져 있다. 강사 목사님이 ‘어찌 저 소나무가 저 바위에 붙어 있을까? 흙도 없는데...’ 저런 소나무가 살고 있다고 얘기를 하더라.
그런데 저는 소나무를 보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소나무가 늘 비가 오기만을 기다릴 것 아니냐?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바위틈에 뿌리가 있으니 바위틈에 졸졸졸 흐르는 물을 먹고 살 것 아닌가? 그러니까 그 소나무가 몇 년 되었는지는 몰라도 요만하다.
1) 모진 생명
저는 여기에서 인생을 보게 되었다. 세상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아무리 그 소나무가 발버둥쳐도 그만큼 이상 더 자라지 못한다. 뿌리가 바위틈에 걸려있기 때문에 만약 나중에 열매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제가 만약 그 소나무라면 갈증으로 충족이 안 되서 갈급한 상태에 있을 것이다. 늘 걱정과 염려에 가득할 것 같다. 꼭 그 모습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의 모습’ 같더라.
2) 풍성한 생명
그런데 그 바위 옆으로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랐다. 왜냐? 그 나무들은 뿌리가 땅 속 깊이 내렸다. 제가 보기에도 그 나무들은 영양분이 풍부하게 보이는데, 바위위에 있는 나무는 조그만해서 비실비실하다. 너무너무 모진 인생을 사는 그런 사람처럼 보이더라. 그런데 흙위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나무들은 색깔도 다르고 풍성해보였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 안에 심겨진 나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나는 정말 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울이 복음을 받기 전에는 모진 인생을 살았다. 자기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복음을 누리고 인생의 주인이 그리스도요 나와 함께하시고 내 삶을 인도하시는 풍성한 축복을 누리고 살았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것은 모진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식, 지혜와 보화가 다 있다. 우리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그리스도 안에 심겨진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생명을 주시고 풍성케 하시는 축복의 주인공으로 나를 부르셨음을 생각하니 너무 감사했다. 씨가 옥토밭에 뿌려지면 그 씨가 잘 자란다. 그러나 씨가 자갈밭에 심겨지면 얼마나 힘든가?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자갈밭이 아닌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그리스도 안에 심겨진 자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심겨진 우리는 여기서 오는 은혜가 크기 때문에 여유가 생긴다. 평안해진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과 소망이 있다. 다윗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힘으로 인해 기뻐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주위를 돌아보게 되어 있다. 그것이 여유다.
3) 복음 공동체
이번 캠프를 돌아보니까 감사하게 참여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구역에서 식사대접 하느라고 서로 도와주시고 협조하고 후원하시고 얼마나 감사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생명운동 하니까 이 일에 우리가 같이 협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복음공동체라고 한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마가다락방에 모이면 감옥에 갔다. 그 곳에 모였다가 붙잡히면 사형 당했다. 그런데 그 곳에 왜 모였을까? 마가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오는 풍성함을 누렸기 때문에, 그러한 핍박들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세상의 어떤 환경보다도 하나님 주신 은혜가 더 크니까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주신 생명의 축복을 누리면, 마가다락방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이길 수 있는 은혜의 사람들이 모이니까 복음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 사람들을 당할 수 없었고 결국은 이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로마복음화를 이루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풍성한 축복을 누리고, 이 응답을 받으며, 내 주변 사람들을 보니까 너무 소중하다. 복음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고 아끼고, 섬기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 이것이 복음 공동체다.
4) 영적 후대
복음을 누리는 사람들이 모이니까 하나님이 그 열매로 전도의 문을 열었다. 그래서 생명들이 살아나게 되었다. 이게 바로 영적 후대다.
베드로가 사실은 모진 인생을 살았다. 주님을 따라오기 시작하면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니까 마가다락방에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앉은뱅이를 만나게 되고 그 사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물질로 도와줘도 저 사람은 앉은뱅이구나! 그래서 저 사람을 살려내야 되겠구나! 그래서 그리스도 말했는데, 그 사람이 살아났다. 그런데 그 좋은 일 때문에 베드로가 감옥에 갔다.
그러면 베드로가 실망하고 낙심할 수 있었지만, 베드로는 전혀 낙심하지 않았다. 내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구나! 나를 통해 저 생명이 살아났고, 앞으로 많은 생명이 살아나는구나! 그러니까 감옥에 가는 것도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재판장 앞에서 말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음이니라.”
그 이전에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맹세하고 원망하고 저주한 사람이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풍성한 성령의 은혜를 누리고 있을 때 겁내지 않았다. 우리가 겁을 내지 않아야 되겠다고 해서 겁을 안낼 수 있는가? 풍성한 은혜를 받으면 겁낼일이 없다. 그러니까 영적 후대들이 생길 수 있다.
<말씀정리>
1. 우리에게 일어난 신분변화는 적은 변화일지 몰라도 영원한 변화이다.
2. 그리스도의 권세 사단은 그리스도 이름 앞에만 꼼짝 못한다. 우리 인생의 근본문제 해결자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알고 사용하는 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바로 이 주역이 저와 여러분이다.
3.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축복 누리는 사람 통해서 복음공동체와 영적 후대가 일어나게 된다. 이 축복을 저와 여러분이 풍성히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약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생명의 축복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생명의 축복 받은 우리는 말씀을 따르게 되고 예배의 축복을 누리게 하심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권세를 주셔서 사단의 권세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인생의 근본문제 해결자는 언약 가진 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짐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든 생명의 축복을 누리는 자이기 때문에 복음공동체를 이루고 우리를 통해서 영적 후대들이 세워지는 축복의 전달자로 우리를 쓰임받게 하심을 찬양합니다.
이 축복을 우리는 한 주간동안 현장에서 확인하며 누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역사하여 주옵소서. 감사하옵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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