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23일 주일 강단 메시지
본문 : 창세기 50:15-21
말씀 : 두려워 마소서
<성경말씀>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 찌라도 이제 바라건데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이제 용서 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었을 때 울었더라
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인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
<본문>
1. 그리스도 안에
1) 안전한 곳
전국적으로 수해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습니다. 수해를 보면서도 우리가 참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가를 느낍니다. 비가 많이 오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집이 떠나가고 논과 밭이 유실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러나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피해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그러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 손영희 고휘자 집사님이 원통에 사시는데, 이분들이 큰 수해를 만났습니다. 야영장에서 사업을 하려고 모든 준비를 다 갖춰놓고 그 곳에서 두 달 동안 생활을 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전날 저녁에 이상하게 집에를 가고 싶더래요. 그래서 잠깐 집에 갔다 오겠다고 집에 갔는데, 아침에 새벽에 일어나서 야영장에 가겠다고 했는데, 원래는 그분들이 부지런한 분들이니까 5시에 일어나면 야영장에 가는거에요. 그런데 일어났다 잠시 잠이 들었대요. 그런데 전화를 받고 보니까 그 동네에 홍수가 나서 물이 들어온다고 그래서 야영장 뿐만 아니라 집이 다 떠나갔어요. 그리고 그 동네에 다섯사람이 죽었어요. 만약 집사님 내외분이 그곳에 계셨다면 그분들도 똑같이 천국에 가셨겠죠. 제가 금요일에 심방 가면서 “하마터면 집사님 천국에서 뵐 뻔 했네요.” 그랬더니, “그럼요, 목사님 천국에서 뵐 뻔 했어요.” 그런데 집사님이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참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셨다고...” 왜냐면 그 밤에 집에 갈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모든 필요한 물품을 야영장에 다 갔다 놓았기 때문에 집에 가지러 갈 것도 없고, 그런데 이상하게 집에 가고 싶더래요.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셨겠죠. 그리고 그 분들이 평소에 부지런한 분들인데, 그 아침에 일어나서 또 좁니까? 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그 분들이 안 졸았다면 지금 천국에 계신다니까요. 물론 천국에 계시니까 상관은 없지만 이 분들에 대한 계획이 있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셨을까? 이 두 분 집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원통 복음화 때문에 하나님이 살려 주셨다.” 맞는 말 아닙니까? 정말 우리는 사실 죽어도 천국가니까 문제될 것은 없지만, 하나님 계획이 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들게 하시고, 어떤 때는 졸게 하시고, 다 하나님의 은혭니다.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마세요. 꼭 성령인도 못 받는 사람들은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인도받으면 됩니다.
그래서 사 26:4에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그랬어요. 우리가 이 땅에 안전한 곳이 어디입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영원한 반석이십니다. 고전 10:4에는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그랬어요. 우리의 죄와 사단과 지옥권세를 멸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요. 이것은 죽어도 사는 것이요. 살아도 죽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어요.
2) 하나님께로 난 자
그럼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축복을 누립니까? 요일 5:1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우리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인 결단, 결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하나님의 은혜요 더 정확히 말하면 일방적인 축복이요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많이 착각합니다. ‘야, 내가 예수 믿었어!’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내가 결단 한거죠. 그러나 이러한 결단과 은혜가 누구에게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어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되는거요. 그게 우리가 받은 축복 아닙니까? 그게 선물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이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잖아요. 우리의 행위, 우리 결단, 결심이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어느 날 ‘내가 예수를 믿어야 되겠구나! 나 예수 믿지 않으니까 불안해서 도저히 못 살겠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마음을 주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는거요. 이걸 꼭 아셔야 되요.
정말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축복 받은 사람이요. 요 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영접할 수 있습니까? 요 1:13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러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면 예수를 믿을 수 없어요. 이게 우리가 받은 축복입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결단, 우리의 신념에 의한 결단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깨달음이 아니요 하나님께로서 나왔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
그러면 고전 1:30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게 우리가 받은 축복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속초 하나로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는데, 지금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고후 5:17에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랬습니다. 언제요? 그리스도안에 있을 때 우리의 과거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갔어요.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슬픈 과거가 있어요.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되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전 것은 다 지나갔어요. 이것이 우리가 받는 축복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끝납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어요. 롬 8:1에 말씀하고 있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누구도 정죄할 수 없어요. 정죄해봐야 헛것이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니까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되겠다.’ 그게 아니고, 나도 모르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받은 축복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고후 1:21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그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하게 세워 나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 좋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점점 견고해 지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몰라서 “믿~슙니다.” 하면 믿음이 좋은 줄 알아요. 그렇지 않아요. “믿~슙니다.” 이 말은 믿음이 없다는 말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견고하게 해나간다는 말입니다. 이게 내 힘이 아니라니까요. 분명히 주님이 고후 1:21에 말씀하시잖아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견고하게 믿음을 심어주시는 축복이 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 분에게 맡기고 그 분의 인도를 받으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어요. 내가 막 내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발버둥 칠 일이 없다고요.
2. 두려워 마소서
1) 인생의 문제
① 사건
그러면 오늘 말씀을 보시죠. 15절에 “요셉의 형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죄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이게 지금 우리 인간의 문제입니다. 사단에게 속고 있는 문제에요. 우리 자신을 한 번 잘 보세요. 야곱의 아들들의 모습이 꼭 나의 모습입니다. 지금 야곱이 죽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슬픈 일이죠. 그러나 어떤 아버지인들 안 돌아가실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지금 야곱의 아들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인 야곱이 돌아가신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오. 지금까지 자기들의 보호자요 자기들의 변호자였어요. 그런데 이 분이 돌아가셨어요. 나를 지켜주고 변호해 줄 분이 안 계셔요. 그러면 우리가 한 번 보세요. 이 땅에 나를 영원히 보호해주고 변호해줄 사람이 계십니까? 없잖아요.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를 사랑하시지만 영원히 보호해주지는 못하잖아요.
② 과거
그런데 특별히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정말 필요했어요. 왜 필요합니까? 야곱의 아들들은 과거가 있어요. 어떠한 과거입니까? 지금 야곱이 애굽 땅에 갈 때 바로 왕이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 그랬더니 내가 험악한 130년을 살았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130세 때 애굽 땅에 갔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었을 때가 147세요. 그러니까 요셉과 함께 17년을 애굽 땅에서 살았어요.
그러면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갈 때가 17세였습니다. 노예가 되서 감옥에 가고 그랬는데 나이 30이 되었을 때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팔려간 것이 30년 전 일입니다. 그 때의 일이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잊어질 수 없어요. 사람들은 이상하게 과거를 잊지를 못해요. 특별히 요셉을 미워하고 죽일려고 하고 노예로 팔아버리고 그랬거든요. 아버지가 계신 17년 동안은 문제가 없었잖아요. 아버지가 보호해주고 변호해주니까 그런데 그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30년 이전의 일이 잊혀지지 않는 거요. 생각나는 거요.
여러분, 참 우리는 과거가 잘 안 잊혀집니다. 우리가 사람들간의 문제가 과거 문제입니다. 특별히 부부간의 문제 중에 대부분은 과거문제입니다. “옛날에 당신이 그랬잖아요!” 그것을 못 잊잖아요. 잊어보려고 해도 안 잊어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과거의 큰 충격을 받으면 그 충격 받은 상처가 평생 가는 겁니다. 잊어보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꿈에 나타나서 시달리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이 참 많잖아요. 어떤 사람인들 과거에 매여 살고 싶겠습니까? 과거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출발 하고 싶은데, 이게 안 잊어지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③ 염려
지금 야곱의 아들들이 그런 형편이에요. 잊어보려고 해도 안 잊어지는거요. 아버지가 살아있는 17년 동안은 그래도 아버지가 변호해주니까 괜찮았지만 아버지가 안 계시는거요. 그러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저 요셉이 만약에 우리를 미워해서 옛날에 우리가 행했던 악한 일을 보복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까 염려가 밀려오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가서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우리(요셉의 형제들)가 죄를 졌지만 용서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것도 안 되니까 직접 가서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주세요.’ 그러는 거요.
‘염려’라는 것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가 잊혀지지 않는 문제,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잖아요. 요셉은 지금 총리이고, 자기는 지금 힘이 없어요. 지금까지 방패막이 되는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이제는 방패가 없어요. 보호자도 없고 변호자도 없어요. 그러니까 염려가 확 밀려오는 거요. 사람이 그렇잖아요.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잖아요. 나는 해결할 수 없고 죄를 졌고 그러니까 염려가 밀려오는 거요.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염려를 벗어날 길이 없어요. 저와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요. 하나님께로 난자요. 영원한 반석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인데, 이것 놓치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염려를 극복할 길이 없어요. 우리의 과거의 상처를 벗어날 길이 없어요. 참 안타깝죠. 내가 능력이 있으면 괜찮은데, 여러분 잘 보세요. 나를 쳐다보면 얼마나 내가 안 되는지 몰라요. 지금 야곱의 아들들이 자기들을 쳐다보니까 너무너무 비참하잖아요. 이제 아버지도 안 계시죠. 요셉은 총리죠. 자기들이 좋은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요셉을 미워했고, 죽이려고 했죠. 그러니까 염려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게요 사단이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과거를 끈질기게 사단이 속이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하나님께로 난 자가 분명한데 사단이 끝까지 속이는 것입니다.
2) 요셉의 신앙
그런데 요셉을 보세요. 20절에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고 하셨나니...” 반면 요셉은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과 모든 문제를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이 요셉의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이 축복을 누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억울한 일이었든지, 답답한 일이었던지 하나님은 이것을 다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떻게 요셉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었겠어요? ‘야, 형들이 나를 미워하고 팔아먹었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마음속의 상처가 치유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 주인이시고 조금도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 이 일을 허락하신데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지 않겠는가? 이게 요셉이 받은 축복입니다.
저희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과 모든 문제는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선으로 바꾸세요. 이것이 요셉의 신앙고백입니다. 어머니 일찍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형제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자기 자신이 봐도 한심스러운 일이잖아요. 왜 나는 형들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우리 어머니는 왜 일찍 돌아가셨을까? 나는 왜 아버지의 사랑도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쫓겨났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해결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은 분명히 왜 형들이 나를 따돌리고, 노예로 가야 되고 감옥에 가야 되었는지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여기에 하나님의 인도가 있음을 요셉은 믿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죠. 그러면 이런 요셉을 더 이상 당할 자가 없잖아요. 안 좋은 일 있으면 낙심하고 좋은 일 있으면 헤헤하고 억울한 일 있으면 잠 못 자고, 조금 잘 되는 일 있으면 히히덕거리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요셉에게 임해서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되었어요.
3) 두려워 마소서
그런데 요셉이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에요. 21절에 보면 요셉은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요셉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죄를 지면 그 죄 때문에 죄 값을 내가 갚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양심은 바르죠. 그런데 사람은 내가 행한 일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팔아먹으려고 한 것을 갚을 길이 있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인데, 그런데 거기에 딱 사로잡히잖아요.
요셉은 이것을 알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이것은 요셉이 잘났다는 말이 아니죠.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 해결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더 이상 속지 말라는 말이죠.
어떤 권사님이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니까 화를 내고 속상해서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드시고 그러더래요. 그런데 불신자인 남편이 권사님인 부인에게 “여보, 하나님 좀 믿으세요!” 그러니까 불신자인 남편이 보기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권사님은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 좀 믿으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세요! 왜 이렇게 잡히는지 몰라요. 나도 모르게 잡히는거죠. 잡히고 싶어서 잡히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내 연약함 쳐다보니까 잡히는것이고, 나도 모르게 사단이 불신앙 심으니까 자꾸만 잡히는 것이고 나도 모르게 인간관계에 갈등이 생기는거죠. 하나님 앞에 맡기면 이 문제 해결됩니다. 못 맡겨서 내 힘으로 해결해보려고 발버둥치니까 안 되는거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죠. 정말 우리 주님이 내가 죄인 되었을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사실을 꼭 붙잡아야 되요. 롬 5:8에 말하고 있잖아요. 롬 5:10절 에는 더 중요한 말을 해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했어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소망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셨단 말이에요. 우리가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어요.
4) 요셉의 인생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1절에 다시 보면 요셉이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이것이 요셉의 인생입니다. 평생에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았어요. 요셉이 가는 곳 마다 요셉 때문에 다 살아나잖아요.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지만 요셉 때문에 보디발 장군의 집이 복을 받고요. 요셉이 감옥에 갔지만 요셉 때문에 그 전옥이 복을 받고요. 요셉 때문에 야곱의 모든 가정이 다 살아나잖아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살려 주겠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간곡하게 위로했다 그 말이요. 참 은혜 받은 사람이죠. 우리는 이런 축복의 주인공으로 한 시대 쓰임받아야 될 줄 확신합니다.
사람 죽이는 것은 쉬워요. 문제는 살리려고 하니까 복잡해요.
제가 몇 년 전에 한 번 치과를 갔더니 그 의사선생님이 저를 알거든요. 이빨이 별로 안 좋으니까 어느 치과를 갔더니 땜질을 해야 된대요. 그 때는 제가 그 치과가 신뢰가 안 되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하고 나와서 제가 아는 치과를 갔어요.
그랬더니 그 원장님이 저를 아니까 그러시더라고요. “목사님, 왜 땜질을 합니까? 땜질 하려고 하면 그마만큼 많이 파내야 합니다. 땜질하는 것은 마지막 순간이고, 지금 쓸만하니까 그냥 쓰세요.” 하더라고요. 이빨은 자기 이빨 그대로 쓰는 것이 가장 좋대요. 그러다가 하다하다 안되면 땜질 하는 것이고 땜질 하다 하다가 안 되면 빼는 것이지 의사 선생님도 이상한 사람은 무조건 빼고, 덮어씌우고, 땜질 한다는 거요. 그 의사 선생님 말씀이 그래요. “할수 있으면 목사님 그대로 쓰세요. 조금 양치질 살살하시고 그대로 쓰시면 됩니다. 앞으로 몇 년 쓸 거에요. 안 되면 그 때 땜질해도 되요.” 그러시더라고요. 지금까지 제가 땜질을 안했잖아요. 제가 만약에 그 이상한 의사선생님 말 들어서 제가 했다면 그마만큼 제가 손해라니까요.
사람이 뭔가 살리려면 돈이 더 들 수 있고 힘이 들어요. 죽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살리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사람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주신 축복이요 우리의 사명입니다.
3. 복음의 맛
1) 교회의 축복
① 교회 이해
교회를 이해해야 되요. 지난주간 기도수첩에 보면 전도 현장에 만난 사람들 중에서 3명 중에 한 명은 교회 때문에 시험 들었고 상처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통계 수치가 정확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교회를 다녀본 적이 있는데, 4명 중 1명은 교회에서 시험 받았다고 하고, 3명은 교인 때문에 상처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분이 착각했다든지, 그 분의 영적문제가 분명히 있겠죠.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이러한 원인 제공을 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사람을 살릴 생각을 안하면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줍니다. 물론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혹시 목사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얼마 전에 제가 메시지하고 내려갔더니 어떤 초신자분이 “저 얘기 하셨죠?” 저는 전혀 그 분을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상처받으셨어요?” 그랬더니 “그게 아니고요. 제가 목사님 말씀 듣고 많이 생각했어요.” 그래도 다행이잖아요. 상처 안 받았으니, 나는 그 분을 비꼬아서 상처 주겠다는 의도가 없거든요.
이게 참 자기가 착각하든지 오해하든지 영적 문제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나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 성도들을 보게 되면 거의 기도수첩 내용대로 99%가 전도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80%정도는 기도가 안 되고 한 40%정도는 확신이 없고, 그런데 실제로는 확신 없어요. 만약에 수사관들이 쓰는 거짓말 탐지기를 가지고 오늘 하나로 교회에서 예배하는 저를 포함해서 우리 성도들 전부 해보면 거의 확신 없어요. 확신 있는 것처럼 하고 살죠. 정말 확신 있습니까? 감사하죠.
② 참된 교회
그런데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잘 내려놔야 되요. 그러면 정말 개혁됩니다. 정말 교회가 뭔지를 알게 되요. 내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참된 교회, 이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알게 되요.
사람은 다 나름대로 원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원칙만 앞세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삶의 원칙이 있는데, 여기 있는 성도들을 나의 삶의 원칙에 맞춰서 살게 하려고 하면 맞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여러분, 내 원칙에 맞춰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조금 제가 생각해 보니까 내가 세워 놓은 원칙에도 내가 잘 안 맞더라고요. 이게 문제에요. 제가 어떤 친구에게 그랬어요. “계획표를 세워서 한 주간 동안 이렇게 살아라.” 그러니까 그 친구가 “목사님, 계획표는 세우는데, 그것이 잘 안 지켜집니다.” 그랬어요. 그래서 “당연히 안 지켜지지 그러니까 꼭 할 수 있을 만큼만 해라.” 그랬어요. 여러분 계획표 세웠다고 그것이 제대로 되던가요? 우리가 자꾸만 원칙을 앞세우는 것은 나쁠 것은 없지만, 원칙을 앞세우면 나도 모르게 율법체질이 되요. 왜냐면, 그 원칙에 안 맞으니까 정죄하고 심판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율법체질이 되요.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체험하는 것이 참 많잖아요.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증거가 참 많아요. 그런데 내 체험을 너무 앞세우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사람에 따라서 다 달라요. 여기 계시지만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술을 딱 끊어 버렸어요. 현재 계세요. 자기에게 있는 참 좋은 체험 아닙니까? 또 어떤 사람은 예수 영접 하다 보니까 담배를 끊어버렸어요. 끊으려고 노력도 안 했는데, 이런 것들이 참 중요한 체험이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을 주위 사람 모두에게 적용하면 안 맞는 겁니다. 이렇게 내 체험을 강조하고 앞세우게 되면 나도 모르게 신비주의가 되는거요.
또 사람들은 나름대로 삶의 방법이 있어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있어요.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방법이 있고요.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방법이 있어요. 다 나름대로 이렇게 자기 방법이 있는데, 자꾸만 자기 방법을 앞세우게 되면 나도 모르게 인본주의가 체질이 되는 거요. 그래서 참된 교회는 원칙도 있고 체험도 있고 방법도 있지만 어찌하든지 성령의 인도를 받도록 하는 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까? 성령 인도를 받는다는 말은 강단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인도 받는 것입니다. 한 주간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강단말씀을 생각해 보면 강단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정확한 성령인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드리러 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예배드리러 왔을 때 좋은 말씀 듣기 위해서 왔으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성령인도 받을 것인가? 내 삶 속에 한 주간동안 어떻게 내가 성령인도 받을 것인가? 이 받은 말씀을 어떻게 내 삶 속에서 성취시킬 것인가? 이게 성령인도란 말이에요.
그래서 참된 교회는 온 성도들이 성령인도 받도록 하는 것이 성령인도입니다. 만약 어떤 원칙이나 체험이나 방법을 앞세우는 것은 성령인도가 아니란 말이에요. 다 달라요. 예를 들면, 서울에 있는 교회가 인도받는 방법과 우리 교회가 인도 받는 방법이 다를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공부 많이 하는 사람과 공부 안 하는 사람과 방법이 달라요. 여기 박사님이 계시고 아주 무식한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인도받는 방법이 같겠어요?
만약 우리 성도들을 내 원칙에 맞추면 어떻게 되겠어요? 저는 새벽에 일어나는데, 여기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그렇잖아요. 그래서 어쨌든 강단 말씀은 같이 들으니까, 누구나 들으니까 이 말씀을 따라서 인도받는 것이 성령인도란 말이에요.
이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면 복음만이 유일하구나! 정말 우리가 성령충만해야 되겠구나! 내 힘으로 안 되니까 그래서 우리가 계속 말씀을 붙잡는거요. 말씀을 붙잡으면 말씀이 나를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도 하시고요 어떤 문제가 왔을 때 그 말씀 때문에 평안이 오기도 하고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온 성도들이 성령인도 받도록 주님 바라보도록 돕는 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마다 성도들의 수준과 배경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온 성도들이 주님 바라보고 주의 말씀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2) 나의 개혁
이렇게 될 때 나도 모르게 내가 개혁이 됩니다. 여러분, “내가 개혁을 해야 되겠다.” 해서 개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개혁이 되어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람의 능력이 참 대단합니다. 저는 제가 저를 봐도 놀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야, 나는 아무 것도 못한다.’ 그래요. 금방 까지 “난 대단하다, 하나님이 축복 받아서 시대적인 복음운동에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사용하신 것에 참 감사하다.” 그런데 그 순간에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야, 나는 왜 이럴까?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왜 이럴까?” 그래서 유행가 가사에 그런 노래가 있어요. ‘내 마음 나도 모른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어요. 저만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은혜 받고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받고 이런 축복 받았는데, “내가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내 인생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내 시간을 복음 전하는데 다 쓰겠습니다!” 그렇게 결심도 하고요 기도도 하고 그러시잖아요? 그러다가 불신앙이 들어오면 ‘내 인생 드리는 것’은 나중 얘기고 일단 예배드릴 힘도 없어요. 기도할 힘도 없고요. 그게 우리 모습입니다.
성경에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있잖아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보기 좋게 물리쳤어요.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어요. 그런데 그 왕비인 이세벨이 그 소식을 듣고 “내가 저 엘리야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잠을 안 자겠다.”이런 얘기가 들리니까 엘리야가 혼비백산해서 몇 날 몇 일을 도망갔어요. 그래서 로뎀나무 그늘아래 엎드려서 “하나님, 나 못살겠습니다. 나좀 데려가 주세요. 나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엘리야죠. 여기 엘리야 많죠? 엘리야 없습니까? 제가 보니까 제가 엘리야 같더라고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게임이 안되요. 아무 힘이 없어요. 그런데 불신앙 한 번 들어와 버리면 “빨리 데려가세요. 이 땅에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게 우리 인생입니다.
여러분, 엘리야만 그런 게 아니요 가장 성경에 복음을 잘 누리고 잘 전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어떤 고백을 하는지 아십니까? 롬 7:23에 보면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또 다른 법이 죄의 법아래 나를 사로잡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법에서 나를 건져내랴?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 바울은 무슨 얘기를 합니까? 나를 신뢰할 수 없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 나를 신뢰 할 수 있습니까? 이게 바울의 고백입니다. 엘리야가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는 쓰임 받는데, 불신앙 들어가 버리니까 불신자보다 더 불신앙한다니까요. 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잘 전하고 복음을 위해 생명을 다 드렸던 바울이 자기 속마음의 한 쪽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다른 한 쪽은 죄의 법아래 잡혀간다는 그 말이요. 이게 내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장 양심적으로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나의 주인이 되셔야 되고요. 나는 정말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살 수 있다고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내 인생 개혁이요. 내 마음 나도 모르는데, 은혜 받을 때는 다 하다가 조금만 불신앙 들어오면 다 무너지는데요. 나 의지할 곳 없어요. 그래서 내 인생 개혁되는 방법은 주님 바라보는 일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 인생에 그리스도가 주인 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인생 개혁입니다.
3) 복음의 맛
① 하나님의 능력
그러면 이 때부터 우리에게 복음의 맛을 사실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사람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 못합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야 돼!”, “예수 믿는 교회는 없어져야 돼!”, “스데반은 당연히 죽어야 돼!” 자기가 하는 일을 가장 옳다고 생각했어요. 이 사람을 누가 감당합니까? 자기는 절대 실수가 없고 오류가 없고 나는 가장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사람이 ‘나는 조금 부족하지.’ , ‘나는 조금 실수가 있지.’ 인정하는 사람은 그래도 조금 대화가 됩니다. 그런데 ‘나는 옳다!’ 이런 사람은 죽어도 안 되는거요. 우리가 전도현장에서 보면은 “나는 바른 길로 가는데 왜 자꾸만 헛소리하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 많아요. “나는 가장 옳은 길로 가고 있는데, 왜 자꾸 예수 믿으라고 합니까? 그런건 약한 사람들이나 믿는 것이지...” 그런 사람들 많아요. 그런 건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당신이나 나나 죄인입니다.” 하면 “내가 왜 죄인이냐? 내가 무슨 죄를 졌어? 나 깨끗한데...” 대책이 없어요. 이런 사람들은 가만히 놔둬야 돼요. 깨달을 때까지 아직 인생을 덜 살아서 크게 착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정말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다른 사도보다도 더 복음을 위해 수고했지만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라.” 이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② 복음의 맛
여러분, 능력중의 능력이 생각이 바뀌는 것 입니다. 바울은 그 이전에 “나는 절대 잘못한 것이 없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최고의 길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 만나고부터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렇다면 바울은 이 복음의 맛을 봤다는 것 아닙니까? ‘내가 복음의 맛을 몰라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망하게 하고 교회 핍박하는데 쓰임을 받았구나!’ 이것을 깨달았잖아요. 이 복음의 맛을 알고 보니까 무슨 얘기 합니까? 갈 6:14에 “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맛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맛을 안 본 사람이 어디서 공부해서 “여기 좋은 말 있네,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렇게 말했다더라...” 아무 힘없어요. 공부해서 얻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맛을 못 본 사람은 가서 읽어줄 수는 있지만 그 중심이 전달 안 됩니다. 바울은 그 전에 다 자랑했던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맛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인생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자기 목표가 바뀌었잖아요. 누가 이렇게 한 것입니까? 복음 깨닫고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하나 깨달아지고 이해가 되어지고 그러면서 정말 나는 내가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구나! 이것이 깨달아 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맛을 꼭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맛을 보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맛을 못 보면 사람들이 힘들어져요. 바울이 이것을 아니까 복음 아니면 안 되는구나! 기도 아니면 안 되는구나! 이렇게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바울이 “이 말씀 전하는 것 외에는 인생의 이유가 없구나!”, “유일한 그리스도의 말씀 전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구나! 정말 우리 인생이 죄와 사단과 지옥의 권세에 매여 있는데, 이 사람들을 살리는 길은 바로 그리스도밖에 없구나!” 이것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것 전하는 일을 하게 되었잖아요.
③ 복음 공동체
그래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이 있어요. 이 말씀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 응답 받은 것, 갱신해야 될 부분이 있어요. 내가 적용할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을 같이 누리는 것이 바로 복음 공동체에요. 같이 나누는 것이 말씀포럼이에요. 그래서 응답 받을 기도제목 나누는 것이 기도포럼이에요. 그러면서 정말 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같이 나누는 것이 전도 포럼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복음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저와 여러분이 누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정리>
1. 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우연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고 지금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누구도 정죄할 수 없어요. 우리 과거 문제는 완전히 끝났어요. 우리를 견고케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2. 우리 인생문제 해결자인 그리스도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염려할 것이 없어요. 정말 우리는 사람을 살리고 사람 세우는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3. 우리가 교회를 조금만 이해한다면 복음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정말 그리스도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이 먼저 개혁이 되어져서 사람 살리는 데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저와 여러분이 같이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약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임을 알게 하시고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축복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문제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정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 살리는 일에 쓰임 받게 하심을 찬양합니다.
우리 자신이 이 복음의 맛을 누리게 하시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내 생애에 쓰임 받도록 주님이 역사하여 주옵소서.
감사하옵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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