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4일 주일 강단 메시지
● 창세기 38:12-26 나보다 옳도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 자부인 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 설교내용
1. 정복하는 축복
1) 하나님의 복
(1) 하나님의 복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된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는 꼭 확인해야 되겠는데, 평생에 우상 숭배하던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에게 제일 먼저 주신 축복이 복의 근원의 축복을 주셨다. 우리는 꼭 기억 하셔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열심히 다녔더니 복의 근원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처음부터 복의 근원의 축복을 주셨다.
언약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삭에게는 샘의 근원을 주셨다. 이삭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샘의 근원의 축복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축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는데,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에서 약속을 주셨다. “네가 누운 이 땅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다시 이 곳에 데려올 때까지 내가 너를 지키겠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 벧엘의 약속을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나의 노력으로 나의 경건함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축복이다. 우리가 이것을 꼭 기억해야 된다.
우리는 세상적인 축복도 축복이다. 건강한 것도, 돈이 많은 것도, 권력이 있는 것도 축복이다. 그런데 이 축복들은 일시적, 세상적, 제한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영원하다. 변함이 없다. 복의 근원, 샘의 근원, 벧엘의 축복은 변함없는 축복이다.
그러면 구원받은 우리는 예외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복의 근원이요, 샘의 근원이요 벧엘의 축복을 동일하게 주신 것이다. 우리는 꼭 이것을 붙잡아야 된다.
(2) 단을 쌓음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이 축복을 받았는데, 이것을 누리는 길이 예배였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단을 쌓았다고 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보게 되면 단을 쌓는 일 중심으로 그들의 생애가 쓰임 받는다. 그러면 예배의 축복이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복 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 고백하는 것이 예배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예배다.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한 일이 단을 쌓았다.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보면 단을 쌓는 삶을 살았다. 예배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임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롯을 떠난 이후에 마므레 상수리 나무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가병 318명 을 주는 축복을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일을 열심히 하여 벌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쏟아 부으셨다. 이삭이 농사를 열심히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니까 100배의 축복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야곱이 뭔가 열심히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니까 야곱의 축복을 빼앗았던 라반의 마음을 바꿔 버렸다. 그리고 20년 동안 가슴에 한을 품고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야곱을 붙잡으러 오던 에서가 야곱이 예배 드리는 이 시간에 에서의 마음을 바꿔버리고 에서가 도리어 야곱을 축복한다. 예배하는 이 시간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2) 정복하는 축복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복하는 축복을 주셨다. 아브라함에게는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축복하겠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 하나님이 완전 보장하셨다. 그래서 너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 정복의 축복을 주신 것이다. 이삭에게는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축복을 하시는데, 아비멜렉이 이삭을 괴롭힌다. 아무리 괴롭혀도 하나님께서 축복을 이삭에게 쏟아부어 주니까 이삭을 이길 재간이 없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스스로 와서 사이좋게 지내자고 한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르호봇의 축복을 주셨다. “여호와께서 우리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그 지역을 장악하는 축복을 주셨다.
또한 야곱은 예배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데, 원래 에서가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다. 원래 애서는 장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에서로 하여금 가나안을 떠나게 한다. 그래서 야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에게 그런 은혜와 축복을 주셨다.
3) 하나님의 계획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깨달으면 되는가?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게 되어 있다. 한 사람의 복음의 씨가 떨어지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가정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루디아 한 사람이 복음을 깨닫고 그 가정에서 말씀운동 하는데 빌립보 전 지역이 살아나게 되어 있다.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사실 베드로는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베드로를 통해 결국 초대교회가 일어난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시대에 가정과 지역과 민족과 세계를 복음화 할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계획 속에 인도받게 하기 위해서 복의 근원으로 정복하는 축복을 주셨다.
2. 나보다 옳도다
1) 살리는 자
유다의 생애를 보면 유다는 도덕적으로 본받을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창세기 37:26에 요셉이 죽음에 위기에 처해 있다. 일단 구덩이에 빠뜨려 놨는데,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할 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얘기한다. 요셉도 우리 동생인데 죽여서 무슨 유익이 있겠냐? 저기 노예 상인들이 지나가는데, 그들에게 팔아 버리자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유다가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결국은 요셉의 생명을 유다가 살린다. 물론 하나님이 유다를 통해서 하신 것이다.
유다의 생애를 보면 유다는 살리는데 관심이 있다. 창세기 43장에 보면 전 생애가 기근이 돼서 농사가 안 된다. 그래서 야곱의 가문도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애굽 땅에 가면 곡식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애굽 땅에 가니까 야곱이 자식들을 보냈다. 그래서 창세기 43장에 자식들이 가서 곡식을 사러 갔는데 요셉이 알아보고 곡식을 팔면서 “다음에 곡식을 사러 올 때는 내 막내 동생을 데리고 와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곡식을 사러 올 생각 하지 말아라”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형제들을 알지만 요셉의 형제들은 총리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다. 어쨌든, 곡식을 사가지고 왔는데, 곡식 사가지고 온 것을 다 먹은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야곱이 자식들에게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가지고 오라고 말한다. 그 때 누구 하나도 아버지에게 말을 못한다. 그럴 때 유다가 말한다. “아버지, 우리가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러 갔을 때 높으신 총리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우리 집안을 상세히 아는지 동생 하나가 없어진 것도 아시고, 막내 동생이 있는 것도 아는데, 동생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곡식 사러 올 생각 하지 말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니까 야곱이 안 보내는 것이다. 이 때 유다가 어떻게 말하냐면 창43:9에 보면 아버지 제 몸을 담보로 할 테니까 베냐민을 데리고 가라고 말한다. 이렇게 아버지를 설득해서 곡식을 사러 간다. 이렇게 유다는 그 가정을 살리는 사람이다.
창세기 44장에 가서 요셉에게 곡식을 사러 갔는데, 베냐민도 왔구나! 해서 요셉이 잔치도 베풀어 주고 곡식도 팔았다. 그러면서 요셉이 부하에게 몰래 자신의 은잔을 베냐민의 곡식자루에 집어넣도록 한다. 한편 형제들은 대접 잘 받고 곡식 사가지고 돌아오는데, 군대가 쫓아 오는 것이다. 총리님의 아끼는 은잔을 훔쳐갔다고 하면서 은잔이 나오는 사람은 총리의 종이 될 것이라면서 자루를 다 뒤져보는 가운데 베냐민 자루에서 은잔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베냐민이 볼모로 잡혀 종이 되려는 찰나에 유다가 요셉에게 와서 지금까지 되어진 과정을 다 얘기 하면서 요셉을 설득을 시킨다. 이게 창세기 44장 내용이다. 나중에 창세기 45장에서 요셉이 자기의 신분을 밝히게 된다. 그러니까 유다의 생애를 보게 되면 유다의 모든 관심은 다른 별로 윤리적 도덕적으로 본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는 생명 살리는데 관심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여기에 모든 관심이 다 있다.
2) 사단의 방법
사단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유다가 결혼을 해서 아들 3명을 낳았다. 첫째가 엘이고 둘째가 오난이고 셋째가 셀라다. 그런데 첫 아들 엘을 위해 며느리를 맞았는데 그 며느리가 다말이다.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해서 엘이 죽었다. 그러니까 유다가 그 며느리를 둘째 아들에게 들어가게 했다. 이것은 그 당시 시대의 생활 습관이었다. 남자가 죽으면 남자에게서 대가 끊기지 않기 위해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방법이었다. 아들이 없으면 가장 가까운 형제에게 들어가서 첫 아들을 낳으면 죽은 아들의 후손이 되게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난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들을 낳아봤자 자기 아들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아들을 안 낳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악하게 여겨서 오난을 죽였다. 셀라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이런게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하나님의 관심은 생명의 후대가 태어나는 데 있는데 사단은 이것을 태어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사단은 사람에게 명예도 권력도 다른 세상적인 것도 가질 수 있게 한다. 사단이 못하는 것이 있는데 생명만 못 가지게 한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고 권력을 가질 수도 있고 명예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자손이 없다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사단이 하는 짓은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들을 건드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만 구원 받고 더 이상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로 말하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만 복음의 축복 누리다가 천국가고 우리 후대들은 예수와 상관없이 살게 하라는 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이걸 알아야 한다. 지금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다 있는데 영적인 후대만 나지 않도록 영적인 후대만 끊기도록 하는 것이 사단의 방법이다. 오난이 자기도 모르게 사단에게 이용 당한다. 대가 끊기는 일 하나님이 불러 가 버렸다.
3) 초월하는 믿음
(1) 다말의 믿음
다말은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 11절에 보면 아버지 유다가 얘기한다. 둘째 아들까지 죽었고, 셀라는 아직 어리니까 너는 친정 가서 있어라. 셀라가 장성하면 씨를 받게 할 것이라고 약속 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셀라가 장성했는데도 불구하고 유다가 다말에게 아들을 낳을 기회를 주지 않게 하였다. 그런 중간에 유다의 아내가 죽었다. 죽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온다는 말을 듣고 다말이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은 내가 씨를 얻어야 되는데 씨를 얻을 길이 없다. 아버지가 셀라를 주기로 했는데, 셀라도 죽을까봐서 다말에게 주지 않는 것이다. 유다의 인본주의다. 그래서 다말이 과부의 복장을 벗어버리고 창녀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창녀같이 있는 것이다. 유다가 마음도 울적한 가운데 가다 보니 창녀가 있으니까 창녀가 자기 며느린지 모르는 가운데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창녀가 얘기하는 가운데 당신 나에게 들어오면 무엇을 약조물로 주겠냐? 염소새끼 주겠다. 염소새끼가 없으니까 염소새끼를 줄 때까지 무엇을 약조물로 주겠느냐? 당신의 도장, 끈, 지팡이 달라고 해서 하룻밤을 잤는데 잉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는 다말은 창녀복을 벗고 과부 옷을 입고 본래로 돌아갔다.
(2) 언약의 대를 이으라
그러면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다말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씨를 이어야 한다. 그게 자기의 사명이요 다말의 믿음이다. 그 당시에는 언약의 대를 잇는 것이 그 당시 법이었다(신 25:5). 이것을 다말이 알고 자기의 시아버지에게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윤리도 도덕도 떠난 초월적인 믿음이다.
4) 나보다 옳도다
그런데 이 일로 말미암아 애를 갖게 된다. 그 당시 과부가 간음을 해서 애를 가지게 되면 돌에 맞아 죽던지 불살라 죽여야 한다. 얼마 안 되어서 다말이 배가 부르게 되었다. 사람들이 유다에게 애를 가졌다고 불살라 죽이자고 말한다. 불살라 죽이자는 그 찰나에 다말이 말한다. 이 지팡이와 도장과 끈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다고 말한다. 그 때 유다가 많은 사람 앞에서 고백 한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26절) 그 말은 바로 언약의 씨에 대한 믿음이 나(유다)보다 옳다는 말이다. 이게 오늘 말씀이다.
3. 언약의 축복
1) 영적 탄식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몇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르우벤이 동생 요셉을 살리려고 애를 썼지만 잠깐 없는 사이에 요셉은 팔려가고 말았다. 이 일 때문에 야곱이 통곡을 한다. 그러면 정말 우리의 탄식은 무엇인가? 가슴이 아프고 한이 맺히고 눈물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탄식이 무엇인가?
저는 저에게 적용해 보았다. 내게 무엇이 안타까운가? 제가 제일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 내 인생 주인되시고 100% 다스림 받아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이다. 제가 성령 충만하고 은혜 충만하면 내가 죽는데, 그렇지 않으면 내가 빨빨 살아 있어서 내 성질대로 내 기분대로 감정대로 하게 된다. 이게 제 가슴의 한이다. 우리 성도들은 무엇이 한인가? 무엇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속이 쓰리고 후회가 되고 눈물이 날 일이 무엇인가? 저는 보니까 제가 100% 복음이 아니더라 모든 것을 복음의 눈, 복음적 생각, 복음적인 행동을 해야 되는데 제가 늘 복음을 말하면서도 어떨 때는 내 생각과 감정대로 가는 것이다. 체질이 잘 안 바뀌는 것이 탄식이 되더라.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탄식하십니까? 나도 모르게 옛 체질로 돌아가는 나를 보며 탄식이 되더라. 나는 이게 정말 하나님 은혜 아니면 안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고 그리고 이 지역의 후대들이 소망인데 후대들이 살아나지 않는 것이 탄식이 되더라. 그래서 제가 우리 교회에서 후대 살리도록 하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복음 심도록 하는 선교원을 해야 되겠다는 것이 한이 되었다.
하나님의 소원과 방향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복음전도와 상관없이 세상 일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을 보면 때로는 제 눈엔 밥 먹는 짐승처럼 보일 때도 있다. 물론 복음적인 눈은 아니다. 다만 제 눈엔 그렇게 보인다. 제가 치유를 많이 받아야 되겠다.
제가 성도들을 보면서 어렵고 답답한 형편에 있는데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다. 이런 사람들 보면 기쁘고 감사하다. 그런데 정말 어렵지 않은데도 불신앙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면 “내가 목회를 못해도 한참 못했구나! 어쩌면 속초 하나로 교회 다니면서도 불신앙에 잡혔을까? 이상하다. 혹시 돌연변이 아닐까?”이런 생각들이 자꾸 들어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복음적인 생각이 아니다. 제가 생각이 참 많이 바뀌어야 된다.
어떤 성도들은 어려우면서도 중심이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가만히 보면 자기를 위해 쓰시고 세상적으로는 대단한 것 처럼 보이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굉장히 인색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 보면 탄식이 나온다. “야, 저거 가져갈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살까?”그런 마음이 든다. 물론 이것도 복음적인 생각이 아니다. 제가 치유 받아야 될 부분이다. 이게 제 한계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이 기도해 주셔야 한다.
내가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지 그런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왜 저럴까? 하면 힘을 싹 빠지게 하는 것이다. 저를 힘 빼는 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다. 주로 사단을 도와주는 것이다. 제가 이 지역 복음화를 놓고 한을 품고 기도하고 있는데, 힘을 싹싹 빼는 사람은 분명 사단과 가까운 사람이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정복하는 축복을 주셨는데, 신분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불신앙과 온갖 염려 근심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면 저는 탄식이 나온다. “왜 저럴까? 하나님 자년데, 하나님 자녀는 오늘 죽어도 천국 가는데...” 저의 탄식이 주님의 탄식과 비슷할 것이다. 구원 받아놓고 축복 못 누리고, 맨날 망하고 맨날 사단에게 줘 터지고 이것이 주님이 굉장히 탄식하실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어디에 탄식하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양심적으로 대화를 하세요. 내가 정말 어디에 탄식하고 있는지.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인간적으로 볼 때 성경에 기록되면 안 될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의 탄식이 여기 있다. 하나님의 소원이 여기 있다.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 있는지 이걸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2) 한 사람
저는 시골에 자라면서 저의 친구의 집이 참 어려운 가정인데, 그 친구의 형수가 들어오더니 5-10년 지나면서 그 집안이 살아나는 것이다. 아주 어려웠던 가정인데 여자 한 사람이 들어오면서 그 가정이 다 살아난다. 한 사람이 다르구나! 그래서 어릴 때 그것을 보고 결혼을 위해서 많이 기도했다. 여자가 중요하다. 물론 남자는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사람 사이에서도 보면 얼음냉수처럼 시원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되게 답답한 사람이 있다. 어둠이 밀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쁨이 밀려오는 사람이 있다. 우리 교회는 대부분 그렇거든요. 어떤 사람은 분위기를 초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위기를 살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저는 세상을 살면서 말을 재밌게 하는 사람처럼 부러운 사람이 없다. 제가 제일 못하는 것이 그런 거다. 여러분, 사람이 분위기를 살리는 사람이 있다. 한 사람 때문에...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가 우상이 가득한 고린도지방에 왔는데, 이들을 통해 우상의 도시에 우상이 다 무너지고 고린도가 복음화가 되었다. 이렇게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는 한 사람, 다말 한 사람, 유다 한 사람, 살리는 한 사람, 언약의 계보를 이으려고 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역사가 다 일어난다. 정말 하나님의 축복이다. 한 사람 때문에 가정과 교회와 지역이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3) 언약의 계보
그러면 이 다말을 통해 아들이 태어났는데, 마태복음 1:3에 보면 다말을 통해 아들이 태어 났는데, 베레스와 세라라고 한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이다. 유다와 다말을 통해 낳은 베레스를 통해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그 후손을 통해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셨다. 언약의 계보가 이루어졌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도덕과 윤리를 자꾸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덕과 윤리가 필요 없냐?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 그것을 봐야 한다. 유다와 다말을 통해 태어난 후손을 통해 메시야가 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를 통해 복음 받을 한 생명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지 모른다. 이게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다. 나를 통해 한 생명을 얻었다면 이 사람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베레스가 다윗의 조상,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다.
출애굽기 1장에 야곱의 가족들이 요셉을 통해 애굽땅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까 히브리 민족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왕이 히브리 사람을 없애기 위해서 방법을 히브리 사람들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산파에게 남자 아이는 죽이라고 했다. 씨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산파들이 가만히 임금님의 명령을 받기는 받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안 죽이는 것이다. 남자들이 계속 태어나게 되니까 관리들을 보내서 산파들에게 얘기하게 되니까 이 사람들이 지혜가 있어서 히브리 사람은 애굽 사람과 달라서 얼마나 건강한지 애를 난다고 쫓아가면 낳아 버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죽이겠습니까? 하는데, 관리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바로 왕이 모든 남자들은 태어나면 전부 물에 빠뜨려서 죽이라는 것이 임금이 내린 명령이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인가? 씨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바로는 사단을 상징한다. 사단이 하는 짓은 생명의 씨를 없애는 것이다. 우리 후대들에게 생명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다와 다말을 축복하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은 바로는 사단의 앞잡이인데, 사단은 모세가 못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스라엘 백성 다 살려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비밀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 후대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여러분 우리 가문이 사는 것은 후대가 살아야 한다. 부모가 아무리 성공했어도 후대가 망하면 그 가정은 망한 가정이다. 부모가 조금 잘 살지 못했어도 자식이 성공하면 같이 올라간다. 이게 후대다. 우리가 정말 후대에 생을 걸어야 될 이유가 후대가 우리 교회의 미래기 때문이다. 이게 하나님의 소원이다. 사단은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도록 우리 후대를 넘어뜨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 인생의 이유가 있다.
4) 언약의 축복
언약의 계보를 이은 유다와 다말은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 복음을 위해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 조금 헌신할 때에 유다가 받은 축복이 무엇인가? 창세기 49장 8절을 보면 “유다야, 너는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고 한다. 유다는 형제의 찬송이 되었다. 생명 살리는 일에 관심 가진 유다에게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며, 네 원수의 목을 잡는다는 말은 사단을 꺽어버린다는 것이다. 유다에게 주신 축복이다. 우리 가정과 가문에 역사하는 사단의 모가지가 꺽어져 버리는 축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완전 정복의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홀 이라고 하는 것은 임금님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다. 완전히 하나님께서 유다를 축복하셔서 유다의 가문을 통해 메시야가 나오는 것이다.
● 말씀정리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근본적인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정복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은혜 받고 힘을 얻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우리 생애가 쓰임받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소원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선행도 도덕도 중요하지만 생명 살리는 일에 쓰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도 도덕도 뛰어 넘을 수 있다. 사단이 하는 일은 다 줄 수 있는데 생명만 살리지 말라는 것이다. 유다와 다말이 쓰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 언약의 계보를 잇는 생명 살리는 일에 대열 가운데 서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우리가 언약의 축복을 정말 안다면 우리가 정말 탄식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양심적으로 나의 한이 무엇인가? 이것이 선명해지고 기도제목이 되어져야 될 것 아닌가? 우리 인생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일을 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신다. 이 언약의 계보를 잇는 유다 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 가정을 살릴 것이고 지역을 살릴 것이며, 지역 3000전도제자도 세워질 것이고 민족 40만 세계 1천만 제자도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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