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11. 6 하나로 교회 주일 강단 메시지
꿈을 꾸는 자(창 37:5-11)
● 창 37:5-11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 설교내용
1. 하나님이 주신 생각
1) 영적인 축복
사람들이 영적인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고 믿지 않는다. 그런데 영적인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이 영적인 내용이 만약 보여 진다고 하면 훨씬 이해하기 쉬울텐데 영적인 것은 보여지지 않고 느껴지지 않고 감각이 없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아는 사람은 너무나 쉽게 아는데, 모르는 사람은 이것이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설명이 잘 안된다.
우리가 아는데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여 지지 않는다. 누군가 하나님을 봤다고 하면 잘못된 것을 보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귀신을 봤다고 하는데 잘못 본 것이다. 귀신은 영적 존재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이 봤을 때 만약 귀신이 뿔이 달렸다 머리를 헤치고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귀신이 속여서 보여준 것이지 귀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속는다. 영적인 것은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감각이 없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잘 할 수 없고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영혼이 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죽는 것이다. 그러면 영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여야 설명할 것 아닌가? 설명이 안된다. 그러나 영혼이 우리 육체 안에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혼이 육체를 떠나 버리면 죽는 것이다. 이것이 시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는 알고는 있는데도 설명이 잘 안되고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것을 잘 안 믿는다. 지금 우리 예배당 안에 공기가 있다. 눈에 보인다면 공기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데, 공기는 눈에 안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숨을 쉰다는 것은 공기가 있다는 증거이다. 만약 이 곳에 공기가 없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5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이렇게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설명은 안되지만 실재한다. 이렇게 영적인 것은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모른다.
그러면 창3장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인가? 영적인 일이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는 순간 손목이 분질러졌다면 아담과 하와가 빨리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일이 없었다. 또한 딸 때는 괜찮았지만 선악과를 먹을 때 이빨이 부러졌다든지, 먹고 배탈이 났다면 선악과를 먹으면 정말 죽는다는데 그렇구나 하면서 알텐데 느낌이 없었다. 그러다가 망하는 것이다.
영적인 것이 그렇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영적인 일이 일어났다. 선악과를 따먹는 그 순간 그 영혼은 하나님을 떠나고 마귀에게 잡혀 버렸다. 눈에 안보이니까 아담과 하와가 이것을 모른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무엇이 바뀌어졌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다음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2cm정도 커졌는가? 가난한 사람은 떼돈이 벌렸는가? 다리가 아픈 사람은 다리가 펴졌는가? 이렇게 만약 보였다면 설명이 쉽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내 영혼이 살아나고 신분이 하나님 자녀로 바뀌어 버렸다. 이게 안 보이고 안 느껴지니까 사람들이 우리가 받은 영적인 축복이 별거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에 갑자기 돈이 1억, 2억, 10억씩 벌려진다면 예수 믿을 만 하네 그렇게 될텐데, 예수 믿어도 장사 안되는 것은 그대로 안되고 여전히 답답하고 하니까 안 믿어지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여기에 대한 답을 내야 한다.
정말 우리에게 있는 축복이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다 망해도 좋다는 말인가 그 말은 아니다. 내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된다고 했다. 우리는 영혼이 잘되는것! 이것이 최고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자마자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영적인 축복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예수를 믿고 복의 근원이 된다고 했을 때 금방 애를 낳아 버렸다면 하나님이 하신 말이 이해가 될텐데 25년동안 애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꾸만 불신앙하고 속은 것이다.
하물며 우리가 불신앙 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신앙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동창생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원하시는 자들을 불렀다. 제자들은 종교인들이었다. 그러면 제자들이 무엇인가 바뀌었는가? 베드로와 같은 자들은 성질 급한 사람인데,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후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 했을텐데, 그 성격 그대로 있었다. 우리 성도들 중에 성질 급한 사람은 베드로 과이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금방 문제가 해결 되는가? 사람들이 착각을 한다. 우리는 과가 베드로 과다. 그러나 무엇이 달라졌는가? 신분과 인도와 배경이 달라졌다. 이게 영적인 축복이다.
2) 하나님이 주신 생각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생각이 자꾸만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내 모습은 그대로 있지만 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복된 길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쌓여져서 영육간의 모든 축복의 문이 다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비밀을 모르니까 은혜도 못 받고 예배 축복도 놓친다. 그렇게 되니까 결국 자기 수준으로 살게 된다. 자기 생각대로 살다가 망하게 된다.
우리 수준이 얼마나 되는가?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만한가? 최근에 어떤 성도님이 부부싸움 했다고 한다. 부부싸움 할 정도의 인격이다. 부부싸움도 대충 하면 괜찮은데, 이혼하자! 하는 것이 우리의 인격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제가 낙심이 되더라. 복음운동 해야 되는데, 복음운동은 고사하고 부부싸움 하나 해결 못하고 이혼하자 말자 싸움하고 목사가 처량하더라. 부부가 목사와 함께 복음운동하자 해도 이 싸움이 될까 말까 한데, 두 부부가 싸움하니까 은혜생활 못하지 이혼하자, 말자고 티격태격하니까 가서 말도 못하겠지 수준이 이렇다. 그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저의 수준이요 우리 교회의 수준이다. 성도들은 다 목사 수준이다. 제가 이것 생각하니까 제가 얼마나 낙심이 되고 좌절이 되는지, 그래서 하나님, 이 복음운동 해야 되는데 수준 높은 사람 좀 붙여주세요, 그러다가 깨닫게 되었다. “니 꼬라지를 알아라! 니 수준이 무슨 수준인데, 그런 사람을 네게 붙이겠냐!”
우리가 정말 은혜를 받으면 나를 알게 되고 내 수준으로 안 된다는 것을 고백해야 된다. 내 수준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도 못 살리는 주제에 무엇을 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아이구, 목사님 내 수준이 높은데, 목사님이 내 수준을 너무 낮추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 제 수준이 그렇다. 그래서 저는 정말정말 하나님 앞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3) 길들여진 인생
우리 인생은 길들여지지 않으면 내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은혜를 받고 반복적으로 복음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평상시에는 모르는데, 문제만 생기면 내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을 뛰어넘을 수 없다. 문제만 생기면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은혜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결국은 야생마처럼 여기저기 쑤시면서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야생마와 같은 수준인 우리가 복음 안에 길들여지면 달라진다. 저같은 사람은 부부싸움을 해도 이혼하자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겁이 많아서 그런데 안 되겠다. 끝장내자! 이 정도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길들여졌다! 그러면 일꾼 중에 일꾼이다. 야생마는 막 가서 쑤시고 다니는데, 이것이 길들여지면 그 힘이 복음을 위해서 쓰임 받는다. 문제는 내가 은혜에 길들여졌는가? 아닌가?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자기 성격 자기 배경이 그렇다. 이것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길들여지지 않아서 그렇다.
다윗이 고백한다 시 95:6에 “오호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이 다윗이 고백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 앞에 무릎꿇자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나는 살 길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된다는 말이다. 이것 아니면 내가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평소에 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실컷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팔부러지고 다리 부러지고 머리 깨지고 기브스하고 와서 천부여 의지옵소서 하면서 손들고 온다. 인생을 그렇게 살면 되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갈 때 이게 우리가 축복된 인생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예배에 성공하는 것은 은혜에 가장 길들여지는 첫 번째이다. 사단이 우리 성도들을 공격하는 최고의 방법이 예배 못 드리게 하는 것이다. 예배 시간에 와서도 예배에 은혜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자꾸만 내 선입견으로 말씀을 제한한다. 졸게 만든다. 집중하게 못하게 한다. 왜요? 사단이 분명히 존재하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꼭 은혜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예배가 안된다. 영적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이 예배가 안된다. 예배는 드려도 은혜를 못 받는다. 이렇게 사단이 우리 성도 개인을 공격하는 최고의 방법이 예배를 못 드리게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망한다. 가인이 왜 망했는가? 예배에 실패해서 망했다. 예배실패는 곧 인생의 실패다. 예배의 성공은 인생의 성공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이 시간이 어떤 시간인지 우리는 알아야 된다.
다 바쁜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 현장에서 힘든 삶을 살다가 이 귀한 시간을 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데, 이 시간에 은혜를 못 받는다면 이것처럼 억울한 일이 없다. 여러분이 시간이 많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할 일이 없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들을 것이 없어서 목사님 말을 듣습니까?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주신 엄청난 영적인 힘들을 알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알고 천군 천사가 동원되는 것을 알며 흑암이 무너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내 능력, 내 노력 내 힘대로 사는 사람은 예배드릴 필요가 없다. 왜냐면 자기 힘으로 사니까 그러나 정말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한 사람은 예배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가 길들여지는 것이다.
2. 꿈을 꾸는 자
1) 꿈을 꾸는 자
요셉이 두 번 꿈을 꾼다. 한번은 7절에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다음에는 9절에 보면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이렇게 두 가지 꿈을 꾸었다.
저는 이것을 가만히 묵상하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지금 열 두명의 야곱의 아들 중에 요셉만 꿈을 꿨다. 꿈은 사단이 가져다주는 꿈도 있을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개꿈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다. 그러니까 12명의 형제들이 있는데 이 꿈을 요셉에게만 두 번씩이나 반복하며 꾸게 했다.
저는 이것을 묵상하면서 제게 이런 깨달음이 왔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이 땅에 수 많은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인격도 훌륭하고 성격도 좋고 고상하고 실력있는 사람도 많은데, 나같은 것을 하나님이 택하셔서 예수 믿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예수를 믿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셨는데, 내게 하나님께서 오직 그리스도운동 복음 운동 이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제게 깨닫게 하셨다. 저보다 훌륭한 목사님들도 많고 공부 많이 한 목사님들도 많고 아주 인격 좋은 귀한 분도 많은데, 어찌 나에게 이런 귀한 것을 주셨는가? 제가 이것이 깨달아 졌다. 열 두명의 형제들 가운데 하나님이 유독 요셉에게만 이 꿈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제게 구원의 축복을 주시고 지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많은데 하나님이 저에게 그리스도 운동 생명운동 복음운동 영적운동의 축복 속에 있게 하셨다. 이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수준과 상관없이, 내가 기도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요셉은 다른 형제보다 뛰어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요셉은 고자질한 사람이다. 좋은 성격이 아니다. 저 같은 경우 남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으면 다른 사람에게 고자질 잘 안한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 교인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교인들이 저를 닮아서 말을 잘 안한다. 제가 모르고 지낸다. 한참 지나다 보면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하면서 지나가게 된다. 어느 집사님이 교인이 너무 어려움을 당했는데, 목사님에게 말해야 될까 말하지 말아야 될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제게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고자질 하는 것 같애서, 그런데 꼭 알고 기도해 줘야 된다고 하면서 그 집사님이 어쩔 줄 모르고 얘기를 하시더라. 제가 듣고 보니까 제가 당연히 알아야 될 일이고, 기도해야 될 일이고, 목사님으로 할 일이 있다면 어떤 일로 해야 될 일이더라. 참 고맙고 감사한데, 제가 알아야 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말 좀 하고 삽시다. 그런데 요셉은 촐랑이다. 형들 잘못 한 것 있으면 감싸주고 그래야 되는데, 아버지에게 가서 고자질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열 두 아들중에 요셉에게 꿈을 주셨다.
2) 사람의 노력
우리가 수준이 높아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셔서 창세전에 택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생활 잘해서 복음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 무엇인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내가 노력했다면 수고했다면 내 의가 내 자랑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농사하는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한다. 씨는 내가 뿌리지만 열매는 하나님이 주셔야 얻는다고 한다. 농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안 믿는다. 씨를 심어놓고 하나님이 날씨 안 좋게 해 버리면 못 거둔다. 그러니까 복음운동 하기 전에도 농사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하나님도 안 믿는데도, 제가 농부들에게 농사 잘 되셨냐고 물어보면 제가 목사인 줄 아니까 그들이 “아이구, 목사님 하나님이 복 주셔서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러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그 분이 예수 믿는 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농사해 보니까 아무리 자기가 수고하고 애써도 바람 불어버리고 날씨가 안 좋으면 안 되는데, 하나님이 복주셔서 농사가 잘 됬다고 하더라. 참 교회 다니는 사람도 못 깨닫는데, 불신자가 깨닫는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만 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착각하는 지 모른다. 내가 무엇을 해야만 되는 줄 아는데, 이 말은 우리가 할 것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사람의 노력은 필요하지만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3) 인도 받는 자
① 미음과 시기하는 자
그런데 인도를 받는 사람이 있다. 10명의 요셉의 형들은 이것 때문에 미워하고 시기한다. 왜 요셉의 형들이 그렇게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했을까 하는 것을 제가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이 왔다. 요셉이 11번째다. 위의 10명이 형들이다. 꿈의 내용이 내 단을 중심으로 무릎 꿇고 절한다고 했다. 만약 요셉이 큰 아들이라면 이해가 될 것 아닌가? 그런데 가장 낮은 11번째에게 다른 형제들이 절하게 된다고 하니까 화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미워하고 시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것은 요셉의 형들에게만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서열의식이라는 것이 굉장히 많다. 성도들이 말 안해도 연세 드신분은 그런 생각을 한다. 이영자 권사님 어머니 권사님과 전에 있었던 교회에서 십 몇 년 동안 심방을 다녔다. 권사님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라. 목사님, 목사님은 제 막내아들과 동갑입니다. 그러니까 권사님이 저를 목사님, 목사님 하지만 속으로는 내 막내아들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이런 것이 있다. 나이 좀 젊은 사람이 뭐라고 하면 “나이도 어린 것이...” 이런 것이 있다. 만약에 제가 목사를 하면서 제가 삼십대라면 교인들이 저를 보는 것이 다르다. 여기에 연세 많이 드신 분이 많이 계시다. 이 분들이 저를 귀하게 여기고 존경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내 밑의 동생 같은 것이 이런 생각이 있다. 이런 것이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연세 많으신 분에게 제가 늘 깍듯하게 대한다. 이런 부분을 무시해버리면 안된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잘 알아야 된다. 연세 많이 드신 분들에게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 늘 깍듯하게 대해야 된다.
그런데 문제는 어른들이 생각이 바뀌어야 된다. “저 어린것이...” 그러면 안된다. 그러면 요셉의 형들처럼 된다.
여러분 그리고 교회 다닌지 오래다닌 사람이랑 교회 다닌지 얼마 안 된 사람하고... “제가 이 교회 터줏대감인데 내가 우리 목사님과 이 교회를 같이 시작했는데, 인제 나온 것이 교회 나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겁 대가리 없이 설치네... 이런 것이 전부 서열의식이다. 아 그렇구나! 내가 먼저 왔는데, 새로운 사람이 저렇게 복음 안에서 귀하게 쓰임 받고 있구나! 귀하구나! 인정해 줘야 한다.
그리고 늦게 들어온 사람은 늘 생각을 해야 한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된다. 이게 우리 인간이다. 그것을 모르고 인제 들어온 사람들이 은혜 받고 설치면 오래 된 사람들이 눈을 깔아 뭉개면서 인제 들어온 사람들이 뭘 안다고 말은 안 해도 그렇다. 복음이면서도 그게 남아있다. 우리 인간이 은혜 받고 온지 얼마 안된 사람은 먼저 온 사람을 잘 배려할 줄 알아야 된다. 문제는 오래 된 사람이다. “그래, 이제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귀하게 쓰임 받으니 감사한가...”하면서 귀하게 여겨주고 기도해주고 잘 하도록 도와줘야 된다. 일반적인 교회는 심각하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는 여전도회 회장을 세우는데 교회에 먼저 오는 순서대로 서열을 정해놨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싸움 한다고 한다. 교회가 인본주의의 극치를 달려가고 있다.
이게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사단이 역사하는 통로다. 먼저 온 사람은 늦게 온 사람을 잘 도와줘야 정상이다. 그리고 늦게 온 사람은 먼저 온 선배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인제 왔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은혜 생활을 못하니까 “연륜만 쌓였지, 빼빼마른 뼈다귀처럼...” 이렇게 되니까 열 받쳐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다.
또한 중직자들은 주의해야 된다. 내가 중직자라고 폼 재고 있으면 안된다. 그리고 아랫사람은 중직자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된다. 중직자가 돼 가지고 그 모양이라고 하면 안된다. 인간을 이해해야 된다. 우리 꼬라지가 그 정도 수준이니까 잘 알아야 된다. 그래서 중직자들은 일반 성도들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일반 성도들은 중직자들을 귀하게 여길 줄 알면서 잘 도와줘야 된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을 보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없지만 내 동생 요셉에게는 이런 꿈이 있구나! 얼마나 감사한가! 하면서 잘 도와줘야 한다. 그런데 “시퍼런 것이 겁대가리 없이 우리에게 절을 한다고? 이게 보통 버릇없는 놈이 아니구나! 본떼를 보여주자!” 하면서 죽이려고 했다. 그러니까 사단에게 당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성경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었다. 우리는 사단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잘 알아야 된다. 먼저 된 사람은 나중 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나중 된 사람은 먼저 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연세 많은 분들은 젊은 사람들을 아껴줄 줄 알고 젊은 사람들은 연세 많은 분들을 존경할 줄 알며 중직자들은 성도들의 후원자가 되고, 성도들은 중직자들을 귀하에 여기고 이게 복음 아닌가? 이게 복음의 능력이다. 11번째가 뭘 안다고 겁도 없이 그래가지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닌가? 이게 사단에게 속는 것이다.
② 마음에 두는 자
그런데 이 말을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 아버지 야곱이다. 해와 달과 열한별 가운데서 아버지도 포함 된다. 아버지 야곱도 요셉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야곱은 요셉의 말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나와 내 후손을 통해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나와 내 후손 중에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복을 다 받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서 쓰는구나! 이 사실을 마음에 두었다. 이게 얼마나 복음의 사람인가?
저는 야곱의 생애를 말씀을 통해 나누면서 야곱이 보통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다. 인격적으로는 문제가 많은 사람인데, 은혜 계속 받으면서 야곱의 생애가 많이 바뀌었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마음에 두었다. 하나님이 요셉을 세우셔서 쓰시겠구나!
저는 이 문제가 간단해 졌다. 만약에 제 아들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저는 아버지지만 대통령에게 많은 사람들 중 한 백성으로서 무릎을 꿇어야 될 것 아닌가? 그런데 내가 많은 사람 앞에서 “야, 네가 대통령이라고 아빠를 무시하고 멸시해! 나에게 무릎꿇어” 하면 되겠는가? 못난 사람이다. 하나님이 내 아들을 높이셨으면 내가 아들을 높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내 아들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내 아들에게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된다. 이게 복음이다. 야곱이 복음의 사람이다. 야곱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
③ 인도받는 사람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 받는 사람과 인도받지 못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고 있고, 아벨과 가인을 비교하고 있고, 이삭과 이스마엘을 비교하고 있다. 야곱과 에서를 비교하고 있고, 요셉과 다른 형들을 비교하고 있다. 다윗과 사울을 비교하고 있다. 특징이 무엇인가? 그 사람들의 인격과 삶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은 계속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인생의 결론은 어떻게 되었는가? 두 부류의 인생이 서로 달라졌다. 한 인생은 정말 하나님의 축복 속에 후대까지 축복을 받았고 또 다른 한 인생은 자기 당대에는 축복 받았을지는 몰라도 그와 후대는 무너졌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꼭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만 된다.
불신자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잠언 16:4에 “불신자들도 악한날에 합당하게 하시느니라” 불신자도 하나님의 축복이 임해야만 그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다. 하물며 하나님이 안 주시면 안 된다. 어떤 분이 내가 정말 건강관리를 잘해야 되겠다고 보약을 드셨는데 이 양반이 보약을 먹었는데 그 보약이 자기 몸에 안 맞아서 죽게 된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사람이 건강관리를 잘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건강 안 주면 끝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노력하고 애써도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으면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이런 축복을 누려야 될 줄 믿습니다.
3. 언약을 이을 자
1) 주를 위하여
그러면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가? 내가 분명 언약을 이을 자기 때문에 주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복음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교회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늘 판단해야 될 기준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 주 우리 집사님이 식사를 하러 갔더니, 그 집사님이 남편이 너무 멋있게 바뀌었다고 한다.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지 저는 요새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른다고 한다. 옛날에는 남편에게 “이것 좀 해 주세요.” 하면 그 말 듣고 어긋장이 나서 나가서 술 퍼 마셨다고 한다. 그러니 여자 집사님이 얼마나 속이 상하셨는지 그렇게 30년을 살아 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시작하니까 “여보 이것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하면 그 날 당장 해치운다고 한다. 또 집안에서 할 일이 있으면 찾아서 한다고 한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 받고 복음 깨달으니까 그 아내가 너무 소중하다. 그렇구나! 내가 지금까지 가정을 너무 소홀히 살았구나! 내가 아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뭔가 없을까 하고 찾아서 하다 보니까 알아서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 가지고 집에 와서 보면 해놓은 것이 있고 하니까 너무 너무 감사하다고 한다. 그래서 두 양반이 복음이 좋다고 서로 얘기한다고 한다. 30년동안 어긋장을 놓고 살았던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복음 받고 복음 누리다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밥 안먹어도 배부를 만하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게 되면 나만을 위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내 아내가 소중하고 내 남편이 소중하구나! 내 아이가 소중하구나! 정말 내 교회가 참 소중하구나! 하면서 뭔가 할 일을 찾는다. 그래서 헌신으로 기쁨으로 하게 된다. 전에는 누가 시켜서 억지로 했는데, 그게 아니고 기뻐서 내가 아내를 조금이라도 도와준다면 아내가 얼마나 힘을 얻고 기쁨을 얻을텐데 내가 좀 도와줘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인가? 성도들이 제가 가르치기 전에 하나님 은혜로 하라. 남편 좀 높여 주시고, 아내 좀 사랑해 주시고 자식도 좀 잘 돌봐 주시고 부모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교회를 위해서 뭔가 헌신할까 생각도 좀 하시고 목사도 귀한 줄 아시고 좀 그렇게 하세요. 나만 배부르면 되겠다. 남은 죽던지 말던지 그것이 아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체면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복음 때문에 기쁨으로 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우리 자매 한 사람이 저를 개인적으로 제 차 때문에 몇 가지를 도와줬다. 제 아내 차도 고쳐주었다. 수고했다고 했더니 복음 때문에 쓰임받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그렇더라. 이게 무슨 웬 은혜인지 저도 요새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일반 사람들은 조금 일을 했어도 칭찬을 이만큼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삐진다. 그런데 내가 칭찬해 놓고 부끄럽더라. 제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인데, 복음 때문에 목사님을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하는데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되겠구나! 제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영적으로 어린 아이는 조금 교회에서 봉사하면 칭찬을 100배나 해줘야 된다. 물론 그렇다고 칭찬 안하면 되겠습니까 만은,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큰 그릇으로 우리 자신이 쓰임 받아야 한다. 칭찬 해주면 하고 칭찬 안 해주면 안하고 이것이 어린 아이다. 제가 성가대 여기 있지만 한 번도 칭찬 안하고 가만히 놔둔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데 얼마나 감사한가? 그리고 교사들도 아침 일찍 와서 교사하는데 한 마디도 칭찬 안한다. 다 자기 복인데, 왜냐면 큰 그릇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그릇이 커져야 한다. 인정해주고 알아주면 하고 기분이 좋고 입이 쫙 찢어지고, 안 해주면 왜 나를 안 알아주나? 하고 이런 것들이 아니다. 또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데도 선 후배 이런 것들 너무 따지고 하면 이런 것들이 작은 그릇이다. 내가 좀 나이가 많이 먹으면 젊은이들이 더 하니까 이게 너무 귀하구나! 이렇게 여기는 것이 큰 그릇이다.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큰 그릇이지 어른이 뭘 안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작은 그릇이다. 내가 중직자인데 나를 안 알아주고 하는 것이 작은 그릇이다. 또 내가 일반 직분자인데 중직자가 뭐라고 그랬다는 것이 작은 그릇이다. 중직자가 조금 부족해도 귀하다고 여기는 것이 큰 그릇이다. 이제 들어오는 사람이 은혜 받고 천방지축으로 있어도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큰 그릇이다. 조금 은혜 받고 봉사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갖다가 꺽어 버리려고 하는 것이 작은 그릇이다.
우리는 그릇이 커져야 한다. 중직자들도, 새신자들도 그릇이 커져서 우리 중직자들이 이런 중직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여기고, 중직자들은 이런 새로운 신자들이 오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여길 줄 알고 연세드신 분을 귀하게 여기고, 아버지 처럼 어머니처럼 여기고 어른들은 아들처럼 딸처럼 사랑하고 그런 것들이 맞는 것이지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고 노인들은 주책바가지고 중직자들은 목에다가 힘만 주고 새 신자들은 어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것은 작은 그릇이다. 저와 여러분들은 복음 때문에 큰 그릇으로 쓰임받는 축복을 누려야 될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소원
① 생명 운동
하나님의 소원은 생명 살리는 것이다. 다 되어도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헛것이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얘기가 있다. 부자는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돈도 많고 건강하고 명예도 있고 친구들도 많다. 그런데 죽어서 지옥 갔다. 그 인생 실패했다. 생명 없으니까 망했다. 정확히 말하면 생명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사람이 망했다. 하나님의 소원이 생명 전하는 것이다.
② 복음 체질
그러면 우리 자신은 어떤가 복음의 뿌리 안 내리면 자기 문제에 걸려서 넘어진다. 사단이 우리가 구원은 받았지만 이 은혜의 축복 누리지 못하도록 온갖 장애물을 놓는다. 그래서 내 문제에 걸려 넘어진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복음을 들어야 될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는 문제 속에 산다. 그런데 복음에 뿌리 내리지 않으면 내 문제에 걸려서 넘어진다. 언제 복음운동 하겠는가? 복음에 뿌리 내리지 않으면 가정의 문제 해결하지 못해서 늘 가정 안에서 뒤치다꺼리 하다가 인생 다 보내버리는 것이다.
③ 제자의 대열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복음에 뿌리 내려야 될 이유가 여기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한 시대에 복음운동에 평생토록 누가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던지 복음 전하는 제자로 쓰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지난주간 나고야 중부교회에 김재선 권사님이 간증했는데, 그 분이 너무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 부모가 남존여비사상이 너무 강해서 여자는 배울것도 없고 밥 먹는 것도 아까워 했다. 그래서 그 집이 간장공장을 했는데 그 딸 먹는 것이 아까워서 친척집에다 양녀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에도 자식이 있었다. 그러니까 형제들이 “니네집도 살만한데 왜 우리 집에 왔냐?” 계속 그러는 것이다. 계속 왕따 당하고 죽을 고생을 했다. 그래서 형제들이 계속 그러니까 도저히 못살고 몇 년 만에 자기 집으로 돌아왔는데, 자기 형제들이 “왜 그 집에서 살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축내냐?”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그런데 이 권사님이 어렸을 때 무용을 배워서 10대 중반 때 일본의 무용수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밥 먹는 것 하나 때문에 양녀로 팔리고 설움 당한 것이 한이 되어서 죽기 살기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춤을 추고 나면 관객들이 팁을 주는데, 오렌지 쥬스를 한 잔 마시면 500엔을 준다고 한다. 이분이 돈에 한이 맺힌 사람이라서 오렌지 주스를 몸이 노래질 정도로 마셨다고 한다.
그래서 돈을 벌어서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 실패하고 시달리다가 결국은 내림굿을 했다고 했다. 결국은 신을 받아서 오대감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래도 자기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서 철학관에 갔는데, 철학관 그 사람이 당신은 교회 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해서 나고야에서 교회를 찾다가 찾다가 순복음교회에 갔다고 한다.
순복음교회는 열심, 충성, 헌신을 많이 가르친다. 그래서 목사님 가르치는대로 돈 많으니까 예배당 7개 세우고 목사님 차주고 집 사주고 다 했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기 문제는 해결 안되더라.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직원 중에 한 사람이 다락방 하는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늘 기도했는데 사모님이 와서 권사님에게 “권사님 복음운동 하셔야 됩니다.”고 하니까 내가 이렇게 하루 두 시간씩 기도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데, 무슨 복음운동이냐고 했는데, 그 앞에서 메시지 듣더니 영접하더라. 그리고는 나고야 중부교회를 갔는데 교인이 20명 모이는데, 자기는 어느 정도 갖춘 사람이니까 파마를 하고 옷단장도 하며 교회를 가는데, 교회 가니까 교인들도 머리가 귀신 같고 그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였다고 하더라. 와서 말씀은 은혜가 되는데 교인들 보니까 정이 떨어지더라. 그런데 하여간 한 가지 목사님 말씀은 자기 교회보다 은혜가 되더라. 그래서 6개월을 그 교회를 가고 나고야 중부교회를 다녔다. 그래서 교회를 옮기기로 결정을 내리고 그 목사님에게 얘기를 했더니 그 목사님 노발대발하고 조용기 목사님 전화를 수십번 했다고 한다. 교회를 옮겼다고 한다. 제가 그말 들으면서 예배시간에 예배드리러 올 때 잘 좀 꾸며가지고 오라. 그런 사람들 왔을 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권사님이 그러는 것이다. 자기 직원이 40명인데, 몽땅 복음전해서 나고야 중부교회 오게 하고 지금 제자의 반열에 복음운동 대열 속에 들어온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그런 간증 하시더라.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 불신자들은 생명이 없어 죽어가고 있고 우리 자신은 복음 뿌리 못 내리니까 영적인 문제에 걸려 있다. 하나님의 소원은 제자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축복 속에 있어야 된다.
3) 장자의 축복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장자의 축복을 주신다. 누구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셨는가? 실제로 아브라함의 장자는 이스마엘인데 실제 축복은 이삭이 받았다. 이삭의 장자는 에서인데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이 임했다. 야곱의 열 두 형제 중에 르우벤이 장자인데 요셉에게 장자의 축복이 임했다. 특징이 무엇인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 저와 여러분은 장자의 축복을 누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님이 1년을 집사님 집에서 다락방을 했는데, 하나님 은혜가 너무 감사하다고 후대들이 복음에 서게 되고 나도 서게 되고 가정의 흑암이 꺽어지고 평안이 오더라. 복음 때문에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해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 우리는 이 장자의 축복 속에 인도 받아야 된다.
● 말씀정리
저와 우리가 받은 축복은 영적 축복이다. 이 영적 축복을 제일 잘 누리는 것이 예배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언약을 이을 자다 그래서 우리는장자의 축복을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소원인 생명과 복음의 뿌리와 제자 세우는 일에 우리 생애를 드려야 될 것이고 우리는 복음과 교회에 유익한 쪽으로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저와 여러분이 쓰임 받아야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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