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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벧엘의 약속(창 36:1-8) 조회수 : 1907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5-10-25
  첨부파일:   20051023 주일강단 메시지.hwp(27K)
2005년 10월 23일 강단 메시지입니다.

(본문)
1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2 에서가 가나안 여인중 헷 족속중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취하고
3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취하였더니
4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 이러라 그들의 우거한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산에 거하니라



1.하나님이 보시는 눈
1)하나님의 약속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을 하고 그 약속들을 지키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약속은 우리가 했지만 지키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누구나 약속을 하면 지키길 원하고 지키는 사람을 신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약속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실수가 많고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약속이 소중하고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약속이 소중하다. 어떤 사람은 약속을 믿고 일을 했다가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우리 사업 현장에 일하시는 분은 약속이 잘못되어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할 때 신중히 해야 되고 약속을 했으면 잘 지켜야 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려고 성경을 기록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일서 2:25에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생명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한 약속 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약속은 연약하고 실수해서 심지어는 악해서 거짓약속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한 약속이고,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약속을 붙잡고 사는 것이다.
2)예수의 이름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인가 빌립보서 2:10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 하늘에 있는 자 땅에 있는 자 땅 아래 있는 자들이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날이 온다는 말이다. 예수는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창조자요 심판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일반적 종교와 우리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종교는 다 우리가 바르고 선하게 살자고 가르치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와 다른 점이 우리의 신분을 바꿀 수 없다. 불신자들이 말하는 사주팔자와 운명을 바꿀 길 없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가 바로 누구인가? 이 땅의 어떤 종교도 원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단의 세력을 깨뜨려 버리고 해방시킬 수 없다. 그리고 지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바로 죄와 사단과 지옥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 아니면 해결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한 생명인 예수를 보내주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흑암의 세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대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성경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 하셔서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그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 길래 우리를 이렇게 살리는 것이다. 예수는 그 자체가 생명이요 이 땅에 오신 목적 자체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져서 우리는 죄로부터 영원히 해방 받는 것이다. 저주로부터 완전히 해방 받는 것이다.
3)하나님이 보시는 눈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어떤 눈으로 보는 가를 봐야 한다. 일반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런 부분에 관심이 간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면이 굉장히 중요하다. 대부분이 외모로 본다. 키가 크냐? 눈이 크냐? 코가 오똑하냐? 얼마나 좋은 집에서 살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한다.
또 우리는 내가 나를 보는 눈이 있다. 이것은 주로 내 내면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눈으로 보시냐?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외형적인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보는 것처럼 내 내면의 문제만 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져 있느냐? 아니냐에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눈은 이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냐? 믿음의 사람이 아니냐? 이것이 하나님의 눈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언약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교회는 생명운동 하는 곳이다. 교회는 정확히 말하면 수준운동 하는 곳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 깨달아서 교회는 율법을 가르치고 윤리를 많이 가르치고, 사회운동을 많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수준이 높아지려고 노력해도 어느 날 실수하는 날이 온다. 사람은 실수 안 할 수 없다. 10년 20년 노력하다가 한번 큰 실수하게 되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생명 전하는 곳이다. 수준운동이 아니라 예수 생명이 들어가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바꾸셔서 수준을 높이신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된다. 우리는 내가 노력해서 뭔가를 쌓았다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느 날 공든 탑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 되신 예수님을 계속해서 듣게 되면 나도 모르게 치유 받고 삶이 갱신되게 된다.
사람은 아무리 수준 높아도 똑똑해도 종은 종이다. 그러나 모자라도 자녀는 자녀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생명 운동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신분이 바뀌지 않으면 사단의 종이요 죄의 종이다. 하나님이랑 아무 상관없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실수가 많고 허물이 많고 좌절이 많아도 예수 생명이 심겨지면 하나님의 자녀다. 이게 우리의 모든 것이다.

2.벧엘의 약속
1)에서와 야곱
(1)에서
그러면 오늘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에서와 야곱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에서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면 에서가 몸이 혈액순환이 잘 되고 붉은 사람이며, 털이 많은 사람 이다는 말이다. 남성다운 사람이다. 그리고 사냥을 잘한다고 했다. 일단 건강하고 민첩하고 기술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에서는 남성스럽고 세상 사람들이 흠모할 만큼 건강하고 능력 있다는 말이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에서는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2)야곱
그런데 야곱은 성경을 보니까 종용한 사람이라고 했다. 성격이 온유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힘이 없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는 뜻 이다. 특별한 기술이 없으니까 집안에서 어머니 잔심부름 하고 있다. 그게 야곱이다. 저도 딸이 있다. 만약에 제게 딸의 사위 감으로 에서같은 사람과 야곱같은 사람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야곱보다는 에서같은 사람을 좋아할 것이다. 왜냐면 힘도 있지 건강하지 기술도 있지 자신감도 넘치는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을 원하지 않겠는가? 야곱처럼 어머니 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남자를 저는 사위로 맞기가 힘들 것이다.
2)단을 쌓는자
그런데 성경은 야곱은 축복을 받고, 에서 또한 축복을 받았는데 그 자손(후대)는 망했다. 에서와 야곱의 차이가 무엇인가? 야곱의 생애를 보면 문제 있을 때 마다 늘 단을 쌓았다고 성경에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에서는 한 번도 그 생애에 단을 쌓았다는 말이 없다. 물론 에서도 이삭의 아들이므로 하나님 자녀인데 에서는 단을 쌓는데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야곱은 단을 쌓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에서와 야곱의 차이점이 이것이다. 성공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하나님과 관계 맺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데 관심이 없고, 야곱은 인간적으로 많이 부족하고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다. 이것이 단을 쌓는 것이다.
성경은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은 결국은 축복받고 승리할 수 밖에 없고 예배에 실패하는 사람은 어느 날 자기도 알지 못하게 무너지고 만다. 에서는 장자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는데, 그 장자의 직분조차도 관심이 없다. 어느 날 그가 산에 가서 사냥을 하고 피곤한 가운데 집에 돌아왔는데, 야곱이 어머니 심부름 하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팥죽 끓이고 있는 야곱에게 에서가 팥죽을 달라고 한다. 야곱이 생각하다가 에서에게 팥죽 대신에 장자의 권한을 달라고 한다. 그래서 팥죽을 에서에게 주고 그는 야곱에게 장자의 권한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다.
장자의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런데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데 별 관심이 없다. 왜 그렇겠는가? 에서는 건강하다. 그리고 기술도 있다.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 축복 아니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단을 쌓는 예배 중심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의 눈이 어느 쪽으로 향하겠는지 우리는 봐야 한다.
3)하나님의 인도를 받는자
또한 에서와 야곱의 차이가 무엇인가? 에서는 창 26:34-35에 보면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는다. 헷 족속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다. 우상숭배하는 가문의 사람을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그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다. 그러면 에서가 이것을 알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삭은 특별히 큰 아들인 에서를 사랑했다. 창세기를 보게 되면 이삭이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까 아들에게 축복하길 원하는데, 에서에게 짐승을 잡아와서 별미를 만들라고 한다. 이삭은 특별히 에서를 사랑했다는 말이다. 언약 없는 아내를 맞이했고 마음에 근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서를 사랑했다.
이 말을 듣고 리브가가 짐승을 잡아와서 야곱의 몸에 털을 붙이고 야곱으로 하여금 축복을 받도록 한다. 이 일 때문에 야곱은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에게 그런 얘기를 한다. 삼촌 라반에게 가서 언약 있는 아내를 맞아라. 에서도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들로 말미암아 어머니 아버지가 기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창 28:8-9을 보면 가나안 여인들이 아비의 기쁨이 되지 못함을 알고도 가서 가나안 사람 이스마엘의 사람들에게 가서 아내를 맞이하고 있다. 부모가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데도 불구하고 에서는 계속 어긋난 길로 가는 것이다. 부모에게 근심되는 길을 계속해서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안 받는 것이다.
결국 에서는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된다. 에돔 족속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민족이다. 36장 5절에 보면 고라의 자손이 나온다. 고라는 나중에 모세를 대항하다가 땅 속에 지진이 나서 그 속에 묻히게 된다. 저주 받아 망하게 된다. 부모의 영적인 것은 자손에게 물려간다. 성공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4)벧엘의 약속
야곱은 인간적으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언약가진 아내를 맞기 위해 라반의 집에 가서 14년 동안 일한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축복 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저주의 길로 가고 상황은 좋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계속 축복의 길로 가게 된다.
우리가 세상적인 축복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 바닷가의 백사장에 모래성을 만들면 참 아름답지만 파도 한번 치면 무너지게 된다. 세상적인 것은 물거품처럼 없어져 버린다. 야곱은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고 에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한 사람은 축복의 사람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은 저주 받을 후손을 낳게 되었다.
오늘 말씀 6-7절에 보면 에서는 물질적인 많은 축복을 받았다. 에서가 다른 데로 가게 되었다. 이것이 응답이다.
6절에 보면 가나안에서 에서는 물질적인 축복을 다 받았다. 그런데 에서는 장정이 400명이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이다. 원래 에서는 가나안 땅에서 살았다. 에서가 이것을 전부 양보하고 다른 곳에 간다. 그러면 가나안 땅은 자동적으로 야곱의 차지가 되는 것이다. 이게 놀라운 응답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셨다. 그 어머니 아버지를 떠나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 꿈속에서 야곱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누운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지킬 것이다. 너의 삶을 완전히 보장하겠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말씀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야곱이 차지하게 되었다. 야곱이 에서와 싸운 것이 아니다. 에서가 스스로 간 것이다. 이것이 응답이다. 사람들은 내가 뭔가 노력하여 차지하려고 한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에서를 떠나가게 하시고 야곱으로 하여금 언약의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야곱이 발버둥치고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야곱에게 주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역사요 하나님의 응답이다.

3.가꾸는 사람
1)하나님의 말씀
(1)하나님의 말씀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붙잡아야 될 것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언약으로 약속으로 붙잡으면 승리한다. 야곱의 생애에 벧엘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을 야곱은 딱 붙잡았다. 그 약속을 붙잡은 그대로 야곱의 생애는 응답을 받는다. 우리 신학교에 김동호 선생님과 같은 반 학생의 여자 분이 있는데 입이 비뚤어졌다. 어릴 때부터, 그러다보니까 무시당하고, 놀림 당하며 살아오다 보니까 어릴 때부터 죽어야 되겠다. 사람들은 그 사람 중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모로 본다. 또 애들은 철이 안 들었으니까 입 비뚤어졌다고 놀림 당하고 그러다 보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래서 이 분은 “내가 어떻게 죽을까?” 하면서 죽을 것만 생각한 사람이다.
어느날 그 분이 요 6:63을 봤는데,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함이라.” 이 말을 읽는 순간 “내가 입이 비뚤어진 것은 내 잘못이 아닌데, 내가 이것 때문에 인생을 포기해야 되는가? 이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육 때문에 인생을 포기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깨달은 것이다. 말씀을 붙잡으면 죽을 사람도 사는 것이다. 물질 때문에 외모 때문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에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했다. 우리가 말씀을 붙잡으면 산다.
(2)의지하는 것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가? 성경에서 야곱이 얼마나 연약한가? 나보다 잘 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없고 좌절되며 낙심된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좌절하고 낙심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분 계십니까? 우린 세상 살면서 내가 무력하구나 연약하구나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들을 수 있다. 이 때 야곱이 한 것이 하나님을 의지했다. 우리는 위로부터 주는 그 은혜, 위로부터 주시는 그 축복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이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인가? 우리가 정말 의지해야 될 분은 하나님이시다.
2)영적지식
(1)영적지식
그리고 우리가 또 알아야 될 것은 영적 지식이다. 에서와 야곱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에서는 인간적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으니까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 이시대도 비슷하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하는 분들이 점쟁이를 많이 찾아간다는 말을 제가 들었다. 정치인들은 보통 우리 수준보다 뛰어나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정치한다. 그런데 그 분들이 점쟁이들을 찾아간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적인 것은 많이 아는데 영적인 것을 모른다. 점쟁이들에게 찾아가면 점쟁이 속에 있는 귀신이 말을 하게 된다. 결국 귀신에게 잡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제사지내고 우상숭배한다.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제사지내고 우상숭배 해도 그런데, 아주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제사지내고 우상 숭배한다. 왜 그런가? 영적인 것 몰라서 그렇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가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살다가 죽어서 지옥에 갔다. 무엇을 말하는가? 부자 주위에는 똑똑한 사람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 주변에 영적인 지식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또 부자는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영적지식을 몰라서 결국 지옥에 갔다. 우리 주변에 똑똑하고 훌륭하고 잘난사람 많은데 영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고 관심도 없다. 그리고 이것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가 죽어서 지옥가게 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왜 망하는가? 영적 지식이 없어서 망해가고 있다. 에서가 그렇게 훌륭하고 똑똑하고 힘이 있고 기술도 있는데 왜 망하는가? 영적인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 정말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2)언약적인 한
우리 신학교에 시카고에 있는 목사님이 와서 설교를 하셨는데, 자기 지역에 훌륭한 권사님 한 분이 계신다고 한다. 딸이 하나가 있는데, 똑똑해서 하버드 법대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래서 변호사가 되어서 시애틀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딸이 성공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안 돼서 시애틀까지 가보니까, 자살해서 죽었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권사님이 자기 딸이 죽은 것도 그렇지만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서 미국까지 와서 딸을 변호사가 되게 해서 자랑스러웠는데, 어느날 자신의 딸이 자살하게 되었는데, 내 인생이 도대체 뭐냐? 하는 생각이 들게 되면서 자기에게 우울증 증상이 오면서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분이 복음을 만나고 내 자식의 세상적인 성공만을 위해서 자식을 가르쳤구나! 육신적인 것만 도와주었지 내 아이에게 영적인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구나! 믿음을 심어주지 않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이 권사님이 한이 되어가지고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식들에게 육신적인 것도 잘 가르쳐야 되지만 영적인 것을 잘 가르쳐야 된다. 어릴 때부터 복음을 가르쳐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 딸처럼 세상 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어느 날 무너지게 된다. 이렇게 복음 전하고 다닌다고 한다.
우리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우리의 생을 투자한다. 그런데 복음이 안 들어가면 어느 날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우리 후대들에게 복음을 심어야지, 육신적인 것만 성공하고 나면 인생의 의미가 없고 허무해지고 만다. 우리 사람은 영적 존재기 때문에 영적인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세상 적으로 하버드대 졸업하고 변호사 되었으면 성공할 만큼 성공했는데, 자기에게 있는 문제 해결 못하고 어느 날 자살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그렇고 후대를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가? 생을 걸고 우리 후대들이 복음 안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대부분 우리 부모들은 육신적으로만 공부하도록 하고 일류대학 가도록 도와주지만 일류대학 갔는데, 이상하게 되어 버리는 경우가 참 많다. 일류대학 갔다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후대들에게 복음을 심지 않으면 이 땅에 오는 영적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 권사님이 한이 되어서 증거하고 다니더라.
(3)좋은 것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좋아하는 것과 좋은 것은 차이점이 있다. 저는 목사지만 노는 것 참 좋아한다. 절제해서 그렇지 텔레비전 참 좋아한다. 저는 텔레비전 한 번 빠져 버리면 몇 시간씩 빠져 버린다. 옛날에는 명화극장 같은 것이 밤 12시에 나오면 그런 것을 늘 봤다. 제 아내가 얼마나 기도 많이 했는지 모른다. 목사가 되어서 늘 그것 쳐다보니까 얼마나 한심하겠는가?
그런데 좋아하는 것과 좋은 것은 같을 수 있지만 틀릴 경우가 많다. 음식도 단것이 맛있다. 그러나 우리 몸에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좋은 것을 구별해서 선택해야 한다. 오늘 날씨도 좋고 설악산에 단풍도 절정일 것이다. 산에 가서 단풍구경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와서 예배드리고 있다. 왜냐면 좋아하는 것 보다도 예배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선택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고 인간 편에서 보면 선택이다. 그래서 이 좋은 것이 쌓여져서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새벽기도도 하고 저녁기도도 한다. 그런데 어떨 때는 제가 갈등이 생길 때가 있다. 축구한다든지 그러면 여기 와서 기도해야 되냐 축구를 봐야 되냐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것은 텔레비전 봐야 되지만 정해졌기 때문에 목사니까 와야 된다. 그러면서 제가 이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정시기도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좋아하는 것 쪽으로 간다면 나는 텔레비전 앞에 있어야 된다. 좋은 것이 쌓여져서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이것을 꼭 확인해야 된다.
3)가꾸는 사람
마지막으로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근본적인 차이는 가꾸냐 가꾸지 않느냐 하는 것에 있다. 정원과 가정은 가꿀수록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정원은 계속해서 가꾸어야 한다. 정원은 안 가꾸면 이상해진다. 용호리에 심방을 갔다. 그런데 농사를 안 짓게 되니까 잡초가 무성해지게 되더라. 우리 인생은 가꿔야 한다. 우리 가정도 개인도 가꿀 줄 알아야 된다. 가꾸지 못하면 사단이 온갖 것 다 심어놓는다.
우리는 영적으로도 우리 자신을 가꾸고 육신적으로 생각도 말도 가꿔야 한다. 가꾸지 않으면 사람이 이상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가꾸는 것이 쉽지 않다. 시행착오도 많고 낙심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잘해보려고 하는데 안 되는 것이 많다. 사람과 많이 대화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말에 실수하지 않기를 많이 노력한다. 그런데 어느 때 보면 실수 할 때가 있다. 그게 제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사람을 잘 살리고 유익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말 하고 있으면서, 생각하면서 보니까 그 사람에게 찌르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낙심이 되고 좌절이 되는 경우가 있더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내가 은혜를 지속해서 받으면 가꿀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내가 옛날에 은혜 받지 못하고 내가 노력할 때는 안 되는데, 내가 은혜를 받으니까 생각이 바뀐다.
미국에 세계적인 가수였던 마리아 앤더슨은 흑인이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 났는데 하나님 은혜로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교회서 가수 공부를 했다. 뉴욕에 맨허튼이란 곳에서 처음 독창을 했다. 그 당시 미국 주류 사회가 백인 사회기 때문에 흑인들을 무시했다. 앤더슨이 너무너무 독창을 잘했다. 그런데 백인이었으면 박수를 쳤을 텐데 흑인여자라서 백인들이 기분이 나쁜 것이다. 그러니까 노래는 잘하는데, 흑인이라서 백인 기자들이 꼬투리를 잡고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앤더슨이 좌절이 되고 낙심이 되겠는가? 그런데 어머니가 앤더슨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의 칭찬보다 더 중요하다. 너는 하나님의 은혜 받은 사람이다. 너의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산다고 했다. 그래서 앤드슨이 늘 이것을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면 기분이 좋고 비난하면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람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승리한다. 이게 나를 가꾸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내가 은혜를 지속해서 받으면서 믿음을 심어주고 사람들을 살려주며 사람들을 세워주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그런데 내 자신이 은혜를 못 받으면 남을 나도 모르게 깍아 내리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남을 낙심시키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오게 된다. 그래서 정원과 가정은 가꿀수록 아름답다. 정원을 가꾸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영적으로 잘 관리하고 육신적인 것도 잘 관리하고 말도 늘 관리하면서 가꾸는 축복을 누려야 한다.

말씀 정리)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진 자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똑똑하고 잘났냐 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인도받는 축복을 누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말씀 붙잡고 영적 지식과 영적 사실을 알고 내 자신을 잘 가꾸는 사람으로 쓰임받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언약기도)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 보게 하시고 말씀을 붙잡게 하시고
예배 축복을 붙잡게 하시고 말씀의 인도 받도록 주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심을 찬양합니다.
이 땅에 영적 지식이 없어서 사람들이 망해 가는데, 영적 사실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를 알고 우리 자신을 가꾸는 축복된 사람으로 우리를 쓰임 받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말과 행동을 관리하는 축복의 사람들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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