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소아시아 일곱 교회 |
조회수 : 2733 |
작성자 : 정경일 |
작성일 : 2004-05-31 |
라오디게아 교회
상당히 인상적인 경치를 갖고 있는 이 지역은 B.C. 1200년 경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수세기가 지난 후 산 기슭에 제2의 도시가 형성되어 고대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B.C. 6세기에 전성기를 맞게 되는 크로수스 왕은 서구인들에게 부를 상징하는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사데는 당시 부유한 상업도시로 직물, 귀금속 생산 및 사금이 유명하였으며 인류 최초로 금화를 만든 곳이기도 했다.
이 곳에는 아시아 지역의 "다산과 풍요의 여신" 아데미신전이 있었으며 부도덕한 제사의식이 거행되곤 하였는데 사데 교회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자"(계 3:1)라는 경고를 받게 된것은 교회가 매우 번성하고 활동적인 반면 이러한 "밀의 종교"의 부도덕한 영향을 받았으며 외관상의 일 만으로는 완성된 일이 아니라고 충고한 요한은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계 3:3)하며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약속했다.
거대한 신전터 한쪽 구석에 붉은 벽돌의 조그마한 비잔틴 교회가 남아 있다. 신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차라리 초라하기까지한 사데 교회는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때의 상황을 궁금케 한다.
시데 체육관
로마시대에 건축된 대리석 건물로 단순히 육체만을 단련하는 범위를 벗어나 일반교육도 이루어졌던 교육의 현장이었다.
이 지역은 리디아(Lydia) 왕국 시대에 칼라테부스(Callatebus)라는 이름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 후 B.C. 159~138 페르가뭄(pergamum, 성서의 버가모)의 앗탈로스(Attalus) 2세는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립, 자신의 칭호를 따서 빌라델비아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합성어로써 "형제애"를 의미한다. 이 도시에는 아무런 고대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이미 마을이 들어서 있어 발굴도 불가능하다. 다만 기독교 유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 하나가 파괴된 모습으로 나마 남아있다. 이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져 사도 요한에게 바쳐졌다.
비교적 높은 4개의 도움으로 구성된 이 교회의 벽에는 11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있으나 그나마도 점차 마모되어가고 있어 방문하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빌라델비아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충성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곳은 타 도시들처럼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그들은 포도를 재배하였는데 소아시아 내의 교회에서 쓰는 성찬식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하였다.
지금도 이 곳에 수십km의 포토밭이 펼쳐져 있다. 또 빌라델비아는 아랍인들의 침략속에서도 끝까지 남아있었던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였었다.
수십 Km에 펼쳐져 있는 빌라델비아의 포도밭
B.C. 7세기 경 리디아(Lydia)인들에 의해 세워진 이 도시는 "펠로피아(pelppia)"라 불리웠다. B.C. 3세기경 "티아(Thya)의 마을"이라고 불리워졌으며 한 때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페르가뭄 왕국의 지배 하에 있다가 로마의 속령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에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로 크게 번성하였으며 1425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두아디라의 역사적 중요성은 군사적인 것과 상업 중심지로서의 역할이다. 두아디라는 지형상 훌 륭한 요새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켰기때문에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은 자연히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다.
그 때 어떤 도시도 두아디라만큼 상인조합(Guild) 조직을 갖지 못했다. 이 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의 도시 외곽에서 만나는 루디아이다. 현재 두아디라는 과거의 어떤 유적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도시의 한 귀퉁이에 아마도 아폴로 신전으로 보이는 신전 하나와 회랑이 있는 길 그리고 하나의 커다란 비잔틴 교회 유적 만이 남아 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사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라"(계 2:20) 여기서 이사벨을 비유로 든 것은 당시 두아디라에 만연한 "삼바데(sambathe)"라고 불리는 여자 무당의 숭배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두아디라 교회의 신도들은 상입 조합에 가입해 비신도들과 어울려야 했다. 이들 조합인들은 그들의 행사에서 신전에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나누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는데 교회의 성도들은 이로 인하여 많은 갈등을 느꼈을 것이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는 내적인 위협은 쉽게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죄가운데 빠지게 한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 (계 2:23)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권면의 말씀으로 위로하신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
.
빈 테페(Bin tepe)
사데 중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빈 테페는 천 개의 언덕이란 뜻으로 한 지역의 이름을 말한다. 언뜻 보기엔 정말 천 개 언덕이 있는듯 싶으나 실상 이것은 리디아 시대의 무덤들로, 실로 강대국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무덤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크로수스왕의 아버지인 기게스 얄라데스의 무덤은 1100m의 넓이에 50m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버가모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 시대부터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막료인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버가모가 천연적 요새에 위치하고 있음을 깨닫고 아크로폴리스의 꼭대기에 성을 쌓도록 하였다.
리시마쿠스의 죽음은 버가모 왕국을 탄생시키게 되고 버가모는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문화와 의학의 도시로 번영하였다.
특히 유메네스 2세(B.C. 197~159)에 의하여 창설된 도서관에는 약 20 만권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양피지도 이곳에서 처음 제조되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신전 건물은 기독교가 국교로 채택된 후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버가모는 로마의 아시아주 수도로 천혜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황제신의 숭배를 거절한 기독교인들에게 대표적인 박해의 장소가 되었던 것을 배경으로 말씀했으며,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추측 된다.
서머나(SMYRNA)/이즈미르(IZMIR)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이어 터키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이며 이스탄불 다음 가는 큰 항구도시이다. 에게해 연안의 천혜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터키의 모든 수출입 물자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며 산업과 경제의 도시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고대의 이즈미르, 즉 서머나는 기원전 3000년경 전반에 이미 바이라클리 지역에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 했음이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터키 중서부지역에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던 이오니아 그리이스인들은 밖으로부터 도리아인들의 침략을 받아 그리이스로부터 쫓겨난 후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와같이 다른 부족으로 주인이 바뀐 사건은 기원전 800년경에 발생했으며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장님 서사시인 호머(Homer)가 서머나에서 태어나 활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때 리디아 왕국의 침략을 받아 페허가 된 이 곳에 알렉산더 대왕은 피구스 산 기슭에 성벽을 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 후 서머나는 버가모(Pergamum)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고 로마제국의 아시아 영토에 편입되었다. 서머나는 비잔틴 제국, 셀주크-오스만 제국 그리고 터키 등의 역사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 지리적인 중요성때문에 계속 번성하였다. 비잔틴 제국은 도시 곳곳에 기독교적 유적을 남겨 놓았으나 아랍 및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기독교 유적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차례의 자연 재난으로 거의 모든 고대 유적지가 대파되었으나 오늘날 여전히 옛날의 영화를 누리고 있다.
서머나 교회(폴리갑 기념교회)
유대인 개종자들로 구성된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에서온 전파자가 세운 듯하다(행 19:10) 요한계시록상의 서머나 교회는 아마도 폴리갑 순교 60년 전에 쓰여진 것 같다. 그 교회는 황제 숭배 반대로 많은 박해를 받았을뿐 아니라 유대의 적대 세력을 만났지만 주님께 충성했기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는다(계 2:9-10) 요한계시록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적인 것들 즉 가난, 비방 그리고 고난 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이들이 부요함과 역사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게 될 것 을 시사해 주고 있다. 시내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는 서머나 교회(폴리갑 기념 교회)는 17세기에 새로 지어진 건물 로 여러가지의 성화가 그려져 있다.
폴리갑(Polycarpus)
폴리갑은 서머나교회의 초기 구성원이었으며 주교로 활약하였다.(A.D. 115~156) 서머나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총독 스타티우스쿠아트라투스가 관장하는 축제 기간동안 주로 빌라델비아에서 온 11명의 기독교인이죽임을 당했다. 이 때 폴리갑 역시 밀고로 체포되어 군중 들 앞에 끌려 왔다. 총독은 그의 기독교 신앙을 부인케하려 했으나 폴리갑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86년간 나는 하나님을 섬겼으며,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나를 외면치 않으셨다. 내가 어찌 나를 돌보아주신 나의 왕 되신 하나님을 모독할 수 있는가?" 군중들은 그를 사자 굴로 던지라고 외쳤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격분한 군중들의 외침은 마치 이렇게 찬양하는것 같다고 했다. ".....이 사람은 아시아의 선생이며, 우리 신들의 파괴자이며, 기독교인의 아버지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