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자녀에게 남기고 싶은 언약_이지영 | 조회수 : 4440 |
작성자 : 훈도 | 작성일 : 2016-03-13 |
지난날을 생각하면 정말 절대주권 속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릴 뿐이다.
이 이야기를 사랑하는 나의 아들 영민이와 나의 딸 지민이에게 남겨주고 싶다.
1. 나의 가문 이야기
나의 이야기에 앞서 나의 가문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나는 4대째 예수 믿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나의 외증조모님은 황해도 개성군 연백에 사셨다. 일 년에 14번씩 제사를 지내던 장손의 며느리로 시집 와서 조상들의 신주를 모시고 온갖 우상 숭배를 다하며 지내셨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강물에 빠져 죽었다. 그 충격으로 괴로워하던 남편은 목을 매어 자살하셨다고 한다. 그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지만 외증조모님은 계속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 선교사와 그를 돕는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듣게 되었고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도자가 대답했다. “집안의 우상과 제사를 버리고 예수님을 믿으시면 됩니다.” 그 말에 두려워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 손으로 조상들의 신주를 치울 수는 없어요.” 그러자 선교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신주와 우상은 제가 치울 테니 당장 예수님을 믿으세요.” 외증조모님은 그 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고, 집안의 모든 신주 단지와 우상들이 버려졌다. 그 날 이후로 외할머니를 비롯한 모든 식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동네 유지였던 외증조모님은 목회자를 청빙하고 교회를 세우셨으며 가문을 우상숭배와 저주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을 다하셨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외증조모님은 외할머니가 시집 갈 나이가 되자 혼처를 알아보셨다. 하지만 사시던 마을에는 예수 믿는 청년이 하나도 없었다. 수소문 끝에 산을 네 고개 넘어서 예수 믿는 집안의 청년을 찾았다고 한다. 외증조모님은 집안과 사람을 볼 것도 없이 외할머니의 혼처로 정하셨다. 늘 기도하던 예수 믿는 집안의 청년이니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이라 믿었다. 얼마 후 외할머니는 시집을 가셨다. 그런데 시댁에 들어가는 순간 너무 놀라 주저앉을 뻔 하셨다고 한다. 초가지붕을 제대로 얹지 못하여 지붕이 내려앉고 매 끼니 보리죽을 먹는 몰락한 양반 집이었다. 대갓집 규수로 살림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외할머니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고 한다. 보리죽이 입에 맞지 않아 거의 물만 마시다가 위장병이 걸리셨다고 한다. 한 달 정도 지나 외증조모님이 쌀 몇 가마니를 가지고 외할머니를 찾아오셨다. 외할머니는 친정 엄마의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 소리도 못 내고 한참을 울다가 이렇게 물으셨다. “엄마, 내가 엄마에게 뭐 잘못 한 거 있어요? 어찌 나를 이런 집에 시집 보내셨나요?” 그 말을 들은 외증조모님은 담담히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엄마가 이 곳에 너를 시집보낸 이유는 딱 하나다. 이 지역에서 예수 믿는 청년이 있는 집은 이 집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제사 지내고 우상 숭배하다가 우리 집안에 어떤 저주 재앙이 내렸는지 말해줬지. 난 너와 네 자손이 나처럼 저주 재앙에 시달리기를 원치 않는다. 출애굽기 20장 4-6절에 우상 숭배하는 자는 자손 삼사 대까지 저주를 받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했단다. 나는 네가 그 천대의 축복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어려움을 이겨내 주었으면 좋겠구나.” 이 말씀을 하시면서 외증조모님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말씀에 힘을 얻은 외할머님은 다음날부터 새벽에 기도하며 남편과 함께 주인 없는 산을 개간하여 과수원을 만들고 밭을 일구셨다고 한다. 몇 년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경제가 회복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에서 최고 부자가 되는 응답을 받으셨다.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이 공산화 되자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교회에 점차 핍박이 거세지더니 6.25가 터지기 몇 달 전 어느 주일날, 예배를 드리던 옆 마을 교회에 공산당원들이 들이닥쳐 성도들을 가두고 창문과 문을 각목으로 막고 불을 질러 온 성도들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일로 인해 인근 모든 교회들은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고 비밀리에 가정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졌고, 하나님의 은혜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이 되어 어느 날 국군이 마을에 들어오고 다시 예배를 회복하는 기쁨을 맛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시작되고 머잖아 다시 공산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외할머니는 그날로 짐을 싸고 남한으로 피난을 가겠다고 하셨다. 시댁의 모든 어른과 이웃들이 엄동설한에 7남매를 이끌고 얼마나 갈 수 있겠냐고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친척들 앞에서 이렇게 담대히 선포하셨다.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그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가다가 죽더라도 예배드릴 자유가 있는 남한 땅에 코 박고 줄을 겁니다.” 너무도 분명한 결단에 할아버지는 소달구지에 이불 몇 채와 쌀 두 가마니를 싣고 길을 떠나셨다고 한다. 그때 나의 어머니는 일곱 살이셨는데 기억나는 것은 소달구지 위에서 내내 우셨던 것이라고 한다.
남한에 피난 내려오신 할머니와 가족들은 전쟁 이후로도 혹독한 가난과 고생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일로 여러 자녀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내가 어릴 적 기억하는 할머니는 이렇다. 추석이나 구정 명절에 삼촌이나 이모들이 올 때, 예배생활을 중단하고 있는 자녀가 오면 아주 매정하게 대하셨다. 선물로 가져온 보따리를 집어 던지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넌 내 아들 아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내 딸 아니다.” 그러면 삼촌이나 이모가 화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했지만 아무런 흔들림 없이 가서 예배부터 회복하고 오라고 내쫓으셨다. 나도 그 때는 조금 너무 하신 것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그런 가르침은 8 남매 모두를 믿음과 예배 속으로 돌아오게 했다. 사실 할머니는 자녀를 내쫓고 밤마다 울면서 많은 기도를 드리셨다고 한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이 사업으로 바빠지시자 외할머님이 나와 동생들을 돌봐주시러 우리 집에 오셨다. 할머니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은 나에게 있어 너무도 감사한 시간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우리 남매는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고 그때마다 할머니는 위와 같은 간증과 성경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배움이 짧으셨지만 성경을 늘 사랑하신 할머니는 생생하고 재미있게 성경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가 어릴 적 성경을 많이 못 읽었지만 성경 퀴즈대회에 나가 항상 1등을 했던 것은 전적으로 할머니의 가르침 때문이다. 또한 할머니는 나에게 종종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만약 북한이 다시 쳐들어와서 믿음을 버리라고 위협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셨다. 두렵기는 했지만 할머니의 담대한 믿음을 들으면서 나도 당당하게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할 것이라 맹세했다.
할머니가 해주신 성경 말씀이 참으로 많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은 외증조모님이 시집 간 할머니에게 해주셨던 출애굽기 20장 4-6절 말씀이다. “지영아, 너는 이제 신앙의 4대째이다. 우리 집안이 우상을 섬기고 제사 지내다가 예수 믿게 된지 4대째가 되었단 말이다. 나는 비록 많이 고생했지만 이제 우상 숭배하던 집안의 저주도 끝난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리고 너의 후손은 예수 믿는 자에게 주시는 천대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할머니의 말씀의 깊이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씀은 뭔가 모를 영적 자부심을 내게 주었고 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믿음이 자리 잡게 해주었다.
2. 내가 만난 예수님
나의 아버지는 제사를 지내던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그러다가 믿는 가정에서 자란 나의 어머니를 만났고 교제 끝에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결혼은 쉽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믿지 않는 아버지를 어머니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실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하는 수없이 예수를 꼭 믿겠다고 굳게 약속하고서야 결혼하실 수 있었다. 결혼 초기에는 여러 핑계를 대며 그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느 날, 외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영화구경을 가자고 하셨다. 아버지는 장인과 모처럼 영화구경 가는구나 싶어 따라 나섰는데...교회였다. 교회에서 전도 집회를 하면서 영화상영을 한 것이다. 물론 기독교 영화였다. 그 날 이후로 아버지는 뒤늦은 신앙생활이었지만 많은 은혜를 누리셨다. 그토록 즐겨하시던 술 담배가 쉽게 정리되는 체험을 하셨고 말씀 읽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으셨다.
우리 집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가정예배를 드렸는데,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가정 예배 시간이었다. 얼마 전 부흥회에서 새찬송가 210장(현재는 178장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을 배워 오신 아버지는 그 찬송을 우리에게 한 소절씩 가르쳐 주셨다. 몇 번이고 따라 부르던 나는 마음에 알 수 없는 감사와 뜨거움을 얻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찬송이 귓가에 맴돌아 나도 모르게 읊조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 날 밤 평생 잊지 못할 꿈을 꾸었다. 2학년이라 등굣길이 제법 익숙했던 나는 꿈속에서 학교를 가고 있었다. 매일 지나치던 골목길을 들어설 때였다. 이상하게 평상시와 다른 집이 나타나고 갈수록 전혀 낮선 곳으로 변하였다. 당황한 나는 어린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 때, 저 골목 끝에 어디서 많이 본 흰 옷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분은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었던 성화 속의 예수님이었다. 나는 너무도 반가워서 “예수님”하며 달려가 주님께 안겼다. 조용히 내 손을 잡아주신 예수님은 이내 길을 안내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자 도무지 알 수 없던 길이 점차 아는 길로 변했다. 너무도 신기했다. 그 때 주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영아, 길을 걸어가다가 알 수 없거든 주여 하고 내 이름을 불러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예수님은 사라지셨다. 아쉬웠지만 지각이 걱정된 나는 학교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다시 알 수 없는 길목을 만나게 되었다. 분명 매일 다니던 길인데 이럴 수가 있는가? 그렇게 당황하던 내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 맞아! 주여 하고 이름을 부르라 하셨지!’ 나는 외쳤다. “주님, 예수님!” 그 순간 내 옆에 서 계신 주님을 다시 뵈었다. “오, 이럴 수가! 제 옆에 계셨네요.” 주님은 말없이 내 손을 잡으시고 다시 길을 인도하셨다. 미로 같았던 길이 순식간에 정리되고 익히 아는 길이 펼쳐졌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사라지셨다.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두 번 더 반복되었다. 똑같은 사건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뜬 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습관대로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아니 그날은 하나님께 질문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저와 늘 함께 계심을 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 아침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그 때, 어린 내 수준에 선뜻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그래, 목사님이야! 목사님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기도하고 말씀 읽고 전도하고 다니시니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실 거야.”
아침 식사 시간에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목사님이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내 고백을 들은 어머니와 할머니는 무척 놀라셨다. 나는 두 분에게 지난 밤 꿈에서 만난 주님과의 일을 말씀드렸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께서 입을 여셨다. “지영아, 정말 주의 종이 되고 싶으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할머니.” 그러자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엄위하게 말씀하셨다. “주의 종이 되려면 그릇이 깨끗해야 한다. 깨끗해야 쓰실 수 있거든.” 지금은 복음 가운데서 그 깨끗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깨끗한 그릇’이란 심히 엄숙하고 무거운 의미로 다가왔다. 비록 우리 가정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을 사랑하는 집안이지만 죄와 의를 정확한 근본 속에서 보지 못하던 때이기에 상당 부분 종교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3. 미로 속을 헤매던 학창 시절
할머니의 기도를 받은 나는 그 날 이후로 하나님의 깨끗한 그릇, 깨끗한 종으로 살려고 애썼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 그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의 주목과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이목사’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면 감사하고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부끄럽고 죄송한 날이 더 많아 갈수록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그런 날이면 잠들기 전에 30분, 아니 1시간이 넘도록 뉘우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복음 깨닫고 나서 돌이켜 보니 그것은 참된 회개의 시간이 아니라 목마른 내 의를 채우려는 종교적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그 기도는 그 시간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도 죄책감으로 인한 고통이 내 마음과 생각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동생들도 없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아무리 회개해도 내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 반복적인 거짓말과 여러 허물은 하나님의 자녀 된 나의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주었다. 사탄의 정죄가 극에 달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너 같은 놈은 버렸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 흘려 죽기까지 너를 사랑하셨는데 너는 고작 그런 죄 하나 못 버리고 더럽혔냐? 너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놈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내 생각인지 누가 주는 생각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 생각에 동의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어린 겁쟁이였지만 나는 과도를 꺼내어 손목을 그었다. 겁을 먹어서인지 제대로 그어지지 않았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용기 내어 제법 강하게 손목을 그어 내렸다. 그러자 손목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피가 흘러내렸다. 무서웠지만 내 피를 보면서 가슴이 후련했다.
그때 다른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언젠가 예배 시간에 들었던 설교 내용이었다. ‘자살은 살인죄와 똑같다. 자살은 죽는 순간에 짓는 죄이기에 회개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 몹시 당황스럽고 두려웠다. ‘나 같은 놈은 죽어야 하지만 그래도 지옥에 가기는 싫어.’ 나는 행주와 수건을 손목에 감아 지혈시켰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예수님, 아무튼 죄송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 이후로도 나는 답을 얻지 못해 쓸데없는 짓을 많이 했다. 5학년 때의 일이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찔린 마음을 가지고 내 방에 들어가 회개를 했다. “하나님, 나의 거짓말을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세요. 정말 다시는 거짓말 하지 않겠습니다.” 창세기 3장 죄의 근본을 모르는 상태에서 보이는 죄만 가지고 하나님과 합의를 보겠다는 나의 교만이었다. 십자가로 얻은 평안이 아니라 결단하는 내 모습으로 얻은 평안은 단 하루도 가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 날 어제의 거짓말로 인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죄책감은 두 배로 커져 내 마음을 짓눌렀다. 나는 견딜 수 없어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 정말 죄송합니다. 딱 한 번만 더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거짓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내 눈물과 진심 어린 결단이 다시금 나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를 모르는 내게 진정한 평안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 날도 나는 다시 거짓말 했으며, 이상하게도 나의 거짓말은 7일이나 계속 되었다.
그 상황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입술의 회개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다. “하나님, 제가 앞으로 죄를 짓게 되면 머리카락을 세 가닥씩 뽑겠나이다.” 정말 영적 무지로 인한 종교적 몸부림은 끝이 없었다. 나는 크리넥스 화장지를 한 장 뽑아 펼친 후 머리카락 세 가닥을 뽑아 무슨 제물 바치듯 고이 싸서 서랍에 넣고서야 안식을 얻었다. 하지만 그 결단마저 참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일주일 후 나는 화장지에 한 가득 쌓인 내 머리카락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죽고 싶었다. 이러다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대머리가 될 것이 확실했다. 깊은 낙심 속에 나는 중얼거렸다. “하나님, 아무튼.. 용서해주세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죄와 싸워 이기려고 몸부림을 쳤다. 사람들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심각한 갈등 속에 있는 나를 경건해 보인다고 칭찬했다. 물론 한 번도 큰 사고를 치지 않고 타락과는 거리가 먼 모범적인 내 모습만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점점 내 자신에 대해 지쳐 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때문이겠지만 성결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도 나의 몸부림과 고통은 계속 되었다. 특히 교문을 들어설 때가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교문을 지나면 큰 바위가 서 있는데 그 위에 커다란 글귀가 적혀 있다. “여호와께 성결!” 초등학교 때 교문을 통과하려면 태극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한 것처럼 신학교를 들어설 때마다 나는 내 영혼에게 다짐했다. “여호와께 성결!”
신학교의 생활은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도 했다. 매일 성경 묵상과 기도 동아리 모임에서의 뜨거운 기도 시간들 그리고 그토록 기다려온 신학 수업은 이 훈련 기간을 통해 뭔가 나를 거듭나게 해 줄 것만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최선을 다해 나의 의를 쌓아 올렸다. 하지만 변한 것 같아 보이는 내 의의 바벨탑이 무너질 때면 너무도 아팠다. 절망이 커지자 오히려 무릎 꿇는 회개도, 흐르던 눈물도 말라 버렸다. 그저 열심히 신학을 하며 교회 사역에 적당한 기술자가 되어 가는 나를 보게 되었다.
4. 전도사, 목사 그리고 다락방
학교 졸업반에 이르자 첫 시무지를 찾아 섬기게 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칭찬 받는 무난한 전도사로 지냈다. 내가 맡은 부서는 중고등부였다. 나는 학생들에게서 나와 똑같은 고통의 길을 걷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묵상했던 말씀과 배운 모든 내용을 가지고 최선 다해 가르쳤다. 하지만 그들에게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없었다. 나도 받지 못한 응답을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
그렇게 6년을 보내면서 교회에서 만난 자매와 결혼했고 그 다음 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원했던 그 꿈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목사가 되었어도 여전히 부끄러웠다. 나는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깨끗한 그릇이 아니었다.
결혼을 앞두고 동료 교역자를 통해 다락방 메시지를 듣게 되었고, 강력한 권유로 부산 1차 합숙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메시지 속에서도 나의 창세기 3장은 참으로 견고한 도성이었다. 그저 조금 새로운 방식의 메시지라고 생각했고 전도 현장에 나가는 것에 대한 도전을 삼는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는 흑암 상태였던 것 같다.
다만 기억에 남는 메시지는 창세기 3장 근본 문제와 그 해결자로 오신 여자의 후손이었다. 모르던 내용은 아니지만 모든 문제의 근원과 해답이 이것이라는 말씀이 신선하게 와 닿았다. 그 이후로 창대교회에서 강서로교회로 이어지는 핵심집회에 종종 참석했지만 거기까지였다. 타교단 부교역자로 지내는 신분이라 다른 훈련까지 참석하기란 어려움이 많았다.
5. 이혼의 위기 속에서
가난한 전도사였기에 결혼하고서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아내도 비교적 시집살이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달 정도 지나자 아내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님이 당신만 나가면 나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셔.” 아내가 하는 어머니에 대한 말은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내가 30년 동안 지켜본 어머니의 신앙 인격과는 전혀 다른 모습과 말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못 믿겠다고 하자 아내는 그러면 자기가 거짓말로 어머니를 모함하는 것 같으냐고 반문했다. 얼마 후 아내의 말이 사실임을 우연히 확인하게 되었다. 4대 독자인 나를 주의 종으로 바라보며 지극한 애정으로 길러주신 어머니. 그런데 나와 함께 하게 된 내 아내를 보면서 영적 문제가 드러나신 것 같았다.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미숙한 나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아내와는 점차 대화가 줄어들었고 갈등은 깊어만 갔다. 참다 못한 나는 아내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인격적으로 수양이 부족하고 성격이 좋지 못하다고 폄하했다. 아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작심한 듯 나에게 반격을 가했다. “당신은 뭐 나은 줄 알아? 당신은 이중인격자야!” 나는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나였다. 나는 당장에 내가 어찌 이중인격자냐고 따졌다. 그러자 아내는 그동안 지켜본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내 아내가 그렇게 분석적인 사람인지를 그때 처음 알았다. 아내의 날카로운 지적은 고양이의 발톱처럼 쓰리고 아팠다. 나는 한 마디도 변명하지 못했다. 나도 몰랐던 나의 깊은 이중성을 그날 보게 된 것이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내 죄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비록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라 위안하며 지내왔는데... 정말 나란 인간은 아니었다. 쓰레기였다. 모르던 죄까지 확인하니 마음이 더 아팠다.
그리고 아내는 말했다. “더 이상 당신과 살고 싶지 않아. 이혼하자.” 정말 앞이 캄캄했다. 완전 쓰레기 인생에 이혼까지. 보이지 않는 죄도 감당하기 힘든데 주홍글씨 같은 이혼까지? 감당 못할 일이었다. 나는 말했다. “이혼하려면 너나 해. 목사로 살기로 한 난 절대 이혼 못해!”
6. 게임 중독의 수렁 속에서
결혼한 지 1년이 가까워 왔을 때, 장인어른이 부르셨다. “내 딸 좀 살려주게.” ‘내가 정말 아내를 죽이는 사람인가? 왜 이러시지’ 싶었다. 하지만 아내의 상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생각 말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게.” 처갓집은 시무하던 교회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새벽예배와 공예배, 그 외의 사역을 생각하면 여러 면에서 좋아 보였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도 어렵지 않았다.
처가살이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내를 데리고 들어가자 장인 장모는 내게 과한 환대를 해주었고 여러모로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 사역을 마치고 들어가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다과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웃으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에 두고 온 부모님이 생각났다. 두 동생도 시집을 다 보내시고 덩그러니 두 분만 계실 모습을 생각하니 4대 독자인 내가 이렇게 지내는 것이 매우 죄송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웃을 수 없었고 저녁을 먹자마자 일을 핑계 삼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막상 방에 들어왔으나 혼자만의 시간을 무엇으로 보내야 할지를 몰랐다. 지금 같으면 3오늘을 하고 나만의 행복한 기도시간을 가졌겠지만, 우울감에 잡힌 나는 묵상이나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때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 그 당시 유행하던 온라인 게임이었다. 학생부를 맡고 있던 내게 한 학생이 게임 시디를 주면서 목사님도 좀 배우시고 함께 하자고 했었다. 늘 학생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나는 무심코 게임을 컴퓨터에 깔았다. 그리고 사용법을 읽어가며 조금씩 익혀나갔다. 처음에는 어렵던 게임이 점점 재미있어졌다. 나중에는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학생들과 게임을 하며 깊어지면서 게임을 배운 목적을 망각하게 되었다. 게임은 잠시 우울감을 달래던 수준을 넘어 생활이 되었고 매일 눈뜨는 이유가 되었다. 처음에는 저녁시간에만 했는데 나중에는 새벽예배 드리러 가기 전까지 하는 중독자가 되었다. 새벽예배에 가서는 기도도 못하고 졸고, 낮에는 현장 가다가 졸음운전으로 몇 차례 죽을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게임을 그만두지는 못했다.
이는 그때까지 살면서 처음 겪는 수준의 타락이었다. 음란물, 술 담배 등 타락이라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 엄격했던 나였기에 그처럼 게임에 빠져든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 내가 이 수준 밖에 안 되나 싶어 기도하며 정신 차리려고 기도에 매달렸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임 중독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었다. 방법이 없자 컴퓨터에서 게임을 지우기도 하고 학생에게 받은 게임 시디를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3일이 못 되어 학생에게 다시 시디를 빌려 게임을 깔았다. 정말 방법이 없었다. 바닥을 드러낸 내 모습에 화가 나서 마우스를 집어 던지고 키보드를 부셨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며칠도 못 가 다시 게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게임 중독에 빠지자 무리 없이 해오던 사역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성실히 돌보던 구역과 사람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예배 시간마다 혼미한 상태로 지냈다. 사역뿐만 아니라 학업에도 심각한 문제가 왔다. 그 당시 평택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하고 있었는데 무난히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앞두고 있었다. 논문을 쓰려면 컴퓨터 작업을 해야 하는데 항상 게임 먼저 시작하니 도무지 논문이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제 때 졸업을 못하고 논문 학기를 연장했다. 경제 사정도 어려운 때였는데 논문 심사 연장비를 추가로 내니 아내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그 마음도 며칠뿐이었다. 다시 한 학기를 허송세월로 보내고 논문 연장비를 또 내야했다. 정말 비참했다. 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학생들에게 미안했고, 늘 나를 믿고 따르던 아내에게도 미안했고, 아무 것도 모른 채 늘 기도하시는 부모님께도 죄송했고, 하나님께는 더더욱 그러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현장 다니다 졸음운전으로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씀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도 사라지고, 그래도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착각도 무너져버렸다. 난 남들보다 형편없는 이중인격자요 그저 그런 쓰레기였다.
7. 근본에 눈을 뜨는 은혜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자 우울감은 심해졌고 그럴수록 게임에 더 매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살 수 없다는 간절함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그때 들려진 메시지가 예수는 그리스도, 근본 문제 해결자였다. 예수님은 만 가지 문제의 해결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만 가지 문제의 근본인 원죄 문제 해결자로 오셨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 들은 메시지는 아니었다. 사역지를 옮기고서 다락방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을 만나 강단을 통해 계속 들은 메시지였다. 그런데 절망의 수렁 속에 갇힌 나를 발견하고 나니 그 창세기 3장 근본 문제가 내 문제로 보이는 것이다. 1차 합숙을 가서 불신자 상태 6가지를 들었을 때, ‘저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모태신앙이고, 나는 일찍부터 영접하여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야. 저런 저주 재앙은 내게 없어. 나는 천대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며 고개를 저었었다. 그런데 수렁 속에 빠진 나를 보니 불신자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 떠나 사탄에게 잡힌 운명으로 태어나 종교 우상 속에 나의 의를 추구하고 살아온 결과 영적, 정신적, 육신적으로 완전 병들고 인생마저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이렇게 가는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랬다. 하나님 말씀이 맞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사탄 문제, 죄 문제, 도무지 하나님 누릴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시다! 아무리 봐도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를 만나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예수님만이 참 나의 선지자시요, 내가 알지도 못하고 또 알아도 해결 못할 죄와 저주를 십자가로 끝내신 예수님만이 참 나의 제사장이시며, 내가 구원 얻었어도 내 힘과 능력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 없기에 부활하사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참 나의 왕이시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나의 참 그리스도이시며, 그 이름에 성령과 천군이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신 것이다!
발견된 그 날부터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가 되어주셨다. 하지만 창세기 3장으로 각인되고 뿌리내려진 체질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도 계속 게임을 하였다. 달라진 것은 게임을 하면서도 예수는 나의 왕 나의 그리스도라고 붙잡은 것이다. “이 속에서는 내가 임마누엘을 확신할 수 없기에 성육신 하사 나와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셨고, 이 속에서는 내 죄와 저주가 끝났음을 확신할 수 없기에 십자가를 지사 심판이 끝난 증거를 보여주셨고, 이 속에서는 내가 사탄에게 승리한다는 확신을 할 수 없기에 부활하사 승리하신 증거를 보여주셨음을 내가 붙잡습니다. 오늘도 예수 이름을 성령이 역사하고 사탄이 결박되며 천군이 수종 드는 영적 사실의 약속으로 붙잡습니다.” 처음에는 이 기도를 하면서도 보이는 내 모습에 묶여서 울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울면서도 이 언약의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기도는 담대해졌다. “이미 모든 문제를 끝낸 증거도 주셨고, 앞으로 내가 승리할 증거도 주셨는데 내가 비참해야 할 이유가 뭐냐? 사탄아 가라. 네가 아무리 보이는 내 모습으로 속여도 예수님이 이루신 그리스도의 일은 영원하며, 그 이름에 응답 주실 미래를 네가 빼앗아 갈 수 없다.” 어느 덧 나의 게임 시간은 행복한 기도 시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8.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응답이다!
언약 기도 속에서도 나의 게임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의 중직자 한 분이 나를 찾아와 호소했다. 아들이 게임 중독에 빠져 직장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그만 두고 또 그만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게 그 아들을 다락방하며 치유해 달라고 했다. 게임 중독자인 내게 게임 중독자를 치유해 달라니!
솔직히 말해 그를 치유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근본 문제와 예수가 이루신 그리스도의 일을 붙잡는 기도는 가르쳐 줄 수는 있었다. 내가 게임이란 수렁을 통해 발견하고 누리게 된 응답이니 말이다. 그 청년을 만나서 게임에 대한 솔직한 느낌과 벗어나고 싶은 열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역시 나와 똑같은 과정 속에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그가 빠져 있는 근본 문제를 게임 속에 나오는 캐릭터를 이용하여 설명해주었다. 그 비유가 적절했는지 청년은 완전 공감하며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창세기 3장 근본문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으며, 그 이름에 하나님 나라와 성령을 약속하셨음을 전했다. 그리고 나는 게임 중독 속에서 그 약속을 잡으며 조금씩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응답 받을 미래를 꿈꾸고 있다고 고백했다. 청년은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날 그와 나는 동일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나는 류목사님의 메시지 중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응답이라는 말씀을 사실적으로 확인했다. 더 이상 게임 중독이 문제가 아니라 내게 주신 응답임을 깨달았다. 종교와 율법 속에서 도무지 발견 못하던 나의 원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 해답을 잡음으로 나와 같은 문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 전할 발판이요 메시지가 되게 하셨음을 체험했다. 더 이상 나는 쓰레기가 아니다. 나는 전도자다. 나는 그리스도를 모신 깨끗한 그릇이요 주의 종이다!
게임 중독에 빠진 청년과 다락방을 시작한 이후로 내게 다락방 문이 새롭게 많이 열리기 시작했고, 현장이 바빠지자 그들에게 줄 메시지를 준비하며, 또 전하러 다니느라 무척 피곤한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피곤해도 게임은 거르지 않던 나였는데 사역을 하다 보니 어느 날 3일째 게임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게임을 하곤 했는데 점차 게임을 거르는 간격이 늘어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게임에 대한 흥미가 나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7년간의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물론 게임 중독이 끝났기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은 아니다. 내 문제가 끝나든 안 끝나든 예수님이 이루신 성육신, 십자가, 부활 사건 때문에 그는 나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든 그 문제는 발판일 뿐 저주도 재앙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나는 정말 복 있는 사람이다. 외증조모님이 소원하셨고, 외할머니가 늘 내게 말씀하셨던 천대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또한 모든 일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내 사건으로, 그 이름을 내 권세로 누리는 내가 하나님 앞에 진정 깨끗한 그릇임을 확신한다.
이 모든 것이 영세 전부터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후대를 위해 복음 가지고 싸우며 기도하신 조상들의 사랑 덕분이라 믿는다. 나 또한 나의 자녀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실 후대 제자들에게 이 완전한 복음을 전달하며 기도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 은혜와 축복이 사랑하는 나의 후대, 언약의 5대인 영민과 지민에게 더욱 넘치길 예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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