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불신자의 저주에서 신자의 축복속으로_김진옥 | 조회수 : 4365 |
작성자 : 훈도 | 작성일 : 2016-03-13 |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 부름 받기 전 나의 지난날은 우환과 질고가 끊이지 않았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나의 고향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상진부리이다. 어린 시절 기억에는 엄마의 모습이 없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외도로 작은 부인이 생기면서 엄마는 내 나이 3세 때 오빠 2명과 나를 놔두고 집을 나가셨다. 작은 아버지 집에 맡겨져서 컸는데 작은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밥을 먹게 했고, 수저를 조금만 소리 내서 내려놓으면 그 즉시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때려서 영문도 모른 채 맞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먹을 것이 없고 배가 고파서 땅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먹었던 적도 있고 뱀장어란 풀을 뜯어서 먹은 적도 있다.
육촌 이모의 집에도 맡겨져서 처음 보는 오빠와 함께 밥을 먹은 적도 있는데 낯가림이 심한 나로서는 너무 힘이 들었고 눈치가 보여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은 적도 있다.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가 얼마나 반갑던지, 그런데 아버지는 껌 한 개를 주고 가버리고 또 다시 혼자 남겨져서 이모 집에서 있었다.
내 나이 다섯 살 때 외갓집으로 옮겨갔고 거기서 처음으로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을 보게 되었고 낯선 아줌마가 오라고 손짓해서 안겼는데 엄마라고 했다. 그리고 또 다시 헤어져서 여섯 살 때 드디어 오빠들과 아버지와 대구로 내려와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 때 엄마는 기사식당을 하고 있었기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고 또 다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간 곳이 육촌 이모의 집이었다. 이때 이모도 이혼하고 다시 재혼해서 대구에 내려와 있었고 아이가 없었기에 거기서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있다가 학교 갈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내다 보니 낯선 환경에 적응을 못해서 기가 죽어 있었고 늘 사람 눈치를 살피는 것이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학교 입학해서 한 학기 정도 다녔는데 엄마가 동생을 낳았다. 엄마, 아빠의 정을 모르고 자란 나였기에 동생이 생기는 것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이때부터 집에서의 힘든 과정이 시작되었는데, 일하는 엄마 대신 동생을 돌보고 저녁식사 준비에 청소까지 해도 아버지 마음에 들게 해놓지 않으면 그날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맞아야 했다.
엄마에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엄마는 동생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떨어져 사는 세월이 길었던 만큼 깊은 정을 느끼지 못하고 컸고 참 많이 외롭고 슬펐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해서 소주 큰 병을 단번에 다 드시고 그 술이 깰 때까지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나를 때리고 부수고 행패 부리는 것이 습관이었다. 술을 안 먹으면 조용하다가 어느 순간 술만 드시면 그러니 온 가족이 늘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런 아버지는 여자가 배워서 뭐하냐면서 살림만 할 줄 알면 된다고 매일 설거지, 빨래를 시키고 검사하고 했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크다 보니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친한 친구 한 명 없이 보냈다. 그래도 공부는 조금 잘해서 선생님들에게는 혼나거나 맞은 기억은 없다.
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을 다니면서 피곤이 누적되었고, 먹는 것은 부실해서 일본 독감이 유행하던 시기에 독감이 걸려 낫지 않고 시간을 끌다가 결국 폐결핵에 걸렸다. 진단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다. 이때는 폐결핵이라는 병이 무서운 병으로 여겨졌기에 직장, 집, 친구들이 모두 피해 다니는 것을 보며 결국 집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고 있게 되었다.
폐결핵 약을 6년을 먹었다. 이 과정에서 거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말이 사라졌고 어두움에 잡혀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집에만 틀어박혀서 기침하고 약을 먹는 나를 미운 물건 보듯 했고 기침이 심해서 구토를 하게 되면 뛰어와서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이 아니라 뒤통수를 때렸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렇게 아픈 것들 외에는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영적문제였구나 이해가 되는데, 아버지는 잠잘 때마다 머리 위에 가위, 망치, 집게를 놓고 주무셨다. 술을 매일 먹다 보니 간경화가 와서 배에 복수가 차올랐고 결국 아버지는 살고 싶어서 대순진리교에 의지했다. 주문을 외우는 책 한 권을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매일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병은 더 심해지고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에 엄마 나이 49세였다. 오빠 두 명에 초등학교 5학년 동생 그리고 엄마. 그때는 몰랐지만 우리 집안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영적문제가 무기력, 게으름, 규모 없는 것으로 나타났음을 이제는 안다.
나는 그러한 가난이 싫어서 열심히 일했고 한국은행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열심히 모았다. 그러나 큰오빠, 작은오빠, 여동생이 돌아가며 사고를 치면서 돈이 모이지를 않았다. 일을 조금 해보겠다고 취직을 한 작은 오빠가 오른손을 기계에 찍히면서 손가락 네 개가 절단되었고 더 이상 취직해서 일할 수 없는 어려움이 왔다. 장사를 해보겠다고 해서 자금을 해주면 장사 밑천을 날리기 일쑤였다. 큰 오빠는 일하기 싫어하고 이 여자 저 여자와 어울려 놀더니 군대 가서는 맞아서 척추가 굽어 제대를 했다. 여동생은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못된 친구들과는 어울려 다니면서 친구를 때려서 경찰서 가서 합의금으로 해결해 준 것이 몇 차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고 엄마는 무당과 형님 동생 하는 사이였고 굿하는 데를 따라다니며 일을 도와주고 며칠씩 자고 오곤 했다. 외가의 큰삼촌은 박수무당으로 속초에서 묘점을 봐주기로 유명했고, 육촌고모가 천신장군 보살로 무당인데 대구에 있었다. 이런 배경이다 보니 엄마가 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해주면 좋겠는데 오히려 모든 것을 나에게 떠맡기고 의지했다. 나 역시도 그 당시 음식을 조금만 잘못 먹으면 잡귀신이 붙는 객고가 들려서 무당 고모에게 가서 양밥을 해서 잡귀신을 떼어내고 하였다.
끊이지 않는 고난, 우환, 질고 속에 피하고 싶어서 직장을 서울로 구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추석, 구정에만 집에 왔다. 엄마 용돈 준비하고 동생 옷 사고 그리고 비상금 모은 것을 가방에 넣어서 집에 와서 인사하고 명절 지내고 서울 가면 이미 가방에 넣어둔 비상금은 누가 꺼내갔는지 없었다.
큰 오빠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계속 돈을 좀 보내라는 연락이 왔고 엄마의 사정하는 목소리에 또다시 모은 것을 줄 수밖에 없었다. 피하고 싶어 서울까지 왔지만 피할 수 없었다. 여동생이 걱정되어서 다시 대구로 내려와서 집을 넓은 곳으로 얻어서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지냈다. 여동생을 데리고 일을 시키면서 중매를 하여 지금의 동생 남편을 만나게 했고 동생이 나보다 먼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엄마와 같이 살다가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결혼식을 올린 후 엄마는 작은 오빠와 살게 되었다. 참 많이도 외롭고 공허한 가슴 때문에 고통스러웠고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지새운 적도 많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데 모두가 나에게만 의지하니 힘겨운 적도 많았다.
큰 오빠도 결혼하고 살림 차려서 일을 시작하고, 작은오빠도 중매해서 결혼시키고, 작은 집이지만 얻어서 시작하고 여동생 결혼하고 이 모든 것을 엄마는 나에게 의지했고 결국 내가 모았던 것 버는 것 다 털어서 해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남편을 만나 결혼 할 때는 모아둔 것이 없어 남편에게 비용을 받아서 결혼 준비를 했고,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얼마 전에 양복 한 벌을 사주었다. 정말 내 인생이 왜 이리 풀리지 않는지, 왜 이리 힘겹고 공허하고 외로운지 정말 기대고 쉬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남편을 만나 사랑받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 알만큼 사랑을 받고 살아왔지만 나에게 있는 문제의 원인을 몰라서 늘 편치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우울증이며 영적문제로 고통 받은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 때는 너무 지치고 피곤하고 공허한 나를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맏며느리로 시집을 왔는데 임신이 되지 않았다. 아마 폐결핵 약을 오래 먹은 것이 원인이 된 것 같았고, 사람 눈치를 잘 보는 내 상처가 다시 나와 늘 눈치를 살피며 살다보니 살기가 싫어졌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나, 죽자 결단하고 식구들이 아무도 없는 날 낮에 집에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약은 없었고 술을 담아 놓은 단지가 보였다. 단지를 끌어안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밥그릇으로 퍼먹기 시작했다. 기억나는 것은 단지에 반 이상을 퍼먹었을 때까지이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이었다. 삼일 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해서 병원에 데리고 갔다가 집에 와있는 것이었다.
남편은 사람이 집에 없으니 찾다가 아무 데도 없자 술 단지가 없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옥상에 올라와서 보니 단지를 끌어안고 누워있었다고 했다. 약을 먹은 줄 알고 너무 놀랐는데 술 단지를 보고 조금 마음이 안심되었다고 했다. 워낙 말이 없고 점잖은 남편, 시어머니, 시동생에게 미안했다. 무어라고 설명할 길이 없던 나는 가만히 있었고 남편이 나서서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고 시댁을 나와 집을 따로 얻었다. 큰아들과 며느리가 이사를 나가니 시어머니가 많이 서운해 하셨다. 이유를 모르시니 그럴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이사를 나가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종일 방안에 혼자 틀어 박혀있었고 몸은 늘 아파서 이곳저곳 다니며 약을 지어다 먹었다. 쌓여가는 약봉투를 보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산다는 것이 지겨웠다. 이런 나를 보는 남편도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어느 날 남편이 지역 광고지를 들고 오더니 복지관에서 홈패션을 가르치는데 가보라는 것이었다. 사람을 만나면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남편의 말에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다.
2. 내가 경험한 신자의 축복
내가 살던 대구 평리동 집 옆 골목에 큰 교회가 있었다. 시장을 갔다가 일부러 빙 돌아서 교회 앞으로 지나오며 교회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이유는 어린 시절 엄마 아버지와 세 들어 살던 주인집 부부를 따라 교회에 나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칠 대로 지쳐서 살고 싶지 않으니 교회에 갔던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님이 계실까? 계시다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교회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데리고 가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내 마음만 간직하고 8개월을 그냥 교회 안을 들여다보고 지나오곤 했다. 남편의 권유대로 복지관에 가기로 결심하고 1시간 거리에 있는 복지관으로 갔다. 3개월 과정을 배우는 동안 조금씩 재미를 느꼈다. 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같이 배운 사람끼리 모임을 갖자는 제의가 나왔고 일요일에 모이기로 했다. 그 때 한 분이 나는 교회 다니니 일요일은 안 되고 토요일에 모이자고 말했다.
마치고 나오면서 내가 먼저 교회 다니세요 라고 물었더니 교회 집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따라가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너무 좋아하면서 다음 주가 총동원 주일인데 잘 됐다면서 가자고 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해서 도무지 갈 수가 없었다. 경북대학병원에 종합검사를 하니 가슴, 폐에 종양이 보인다고 했다. 계속 검사에 검사를 하는데 두 달이 걸렸지만 별다른 이상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몸이 아팠지만 그 집사님께 연락해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가창에 있는 주암교회, 내가 있는 평리동에서 가창까지는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하는 거리라서 11시 예배를 드리려면 집에서 8시에 나가야 했다. 그래도 나를 데리고 함께 교회에 가는 집사님이 있다고 생각하니 전혀 멀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 몇 주 지나자 불면증, 밥 못 먹던 것, 두통, 목 아픈 것이 다 사라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해졌다. 그 즈음에 교회에 담임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는데 그 분이 김언수 목사님이셨다. 다락방을 하고 있던 사모님의 도움으로 복음을 받고 개인양육을 받게 되었다. 1년 정도 개인양육을 받았는데 나와 함께 교회 왔던 집사님이 이사를 반야월로 가게 되어서 같이 가고 싶어서 기도했는데 너무나 쉽게 아파트(임대)가 당첨되어서 같이 이사를 했다. 김언수 목사님께서 그 지역에서 말씀을 다 들어보고 가장 은혜 되는 곳으로 가라 하셔서 그 지역의 큰 교회는 거의 다 가서 예배를 드렸으나 결정하지 못했다.
어느 날, 지하에서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들어갔다가 은혜를 받고 그 날 교회에 등록했는데 그 곳이 동광교회, 지금은 이름이 바뀐 마가다락방 교회다. 김대은 목사님과의 만남, 이 만남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만남이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김언수 목사님과 김경진 사모님, 그리고 동광교회로 인도받아 김대은 목사님을 만나기까지 만남을 정확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할 것 밖에 없다.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가 신선한 공기가 내게 들어오면서 숨을 쉬게 된 것처럼 나는 복음을 받고 난 후 살 것 같았고, 그래서 더 하나님이 알고 싶어서 복음 속으로 날마다 들어가다 보니 영육 간에 건강이 회복되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지 않느냐는 말씀을 주셨다. 포기하고 체념하고 있었던 자녀가 없던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응답, 축복으로 아들 딸 쌍둥이를 낳게 되었다.
키울 수 있는 환경도 주셔서 넓은 집을 얻어 옮기게 되었고 시어머니가 오셔서 함께 키우며 시동생도 함께 살며 돌보아 주었다. 손자를 보고 싶어 하던 시어머니도 마음에 결단을 하고 복음을 받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고,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쌍둥이는 잘 자라서 돌이 지났고 이때부터 훈련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내게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심령에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쌍둥이를 키우면서 은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어서 놓치게 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쌍둥이를 잘 키워주시는 어머니, 시동생, 남편의 도움으로 나는 훈련 속으로 들어가며 더욱 더 복음을 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나와 같은 자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의 소원이 담겨져 경북대학병원에 5년간 현장전도를 나갔다. 그리고 5인1조 팀장으로 지역에 전도운동을 펼쳤고 전도의 맛을 조금씩 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누렸다.
그 즈음에 김대은 목사님이 미국으로 가시고 최영수 목사님께서 동광교회로 오시면서 나에게는 새로운 하나님의 응답이 기다리고 있었다. 1차, 2차 전도집회를 하시면서 5인1조 팀장을 세우시더니 계속 한 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셨고 몇 년이 지나서 지역을 나누어 1-6지역까지 지역장을 세우셨고, 또 다시 몇 년 지나서 지교회를 세우셨다.
이 과정 속에서 나는 현장에 계속 인도 받게 되었고 문복여 씨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응답의 문을 여셨다. 자궁암 말기환자인데 두 달 밖에 살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서 연락을 받고 만남이 주어졌다. 병원에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자신은 교회에 갈 수 없다, 헌금이 부담 된다는 말만했다. 자신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참 답답한 말만 계속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정말 간절히 복음을 전했고, 다음에 연락 달라고 이야기 하고 나오는데 나를 다시 부르더니 한 번 더 새로 이야기 해달라고 해서 천천히 자세하게 복음을 전했더니 복음을 받아들였고 매일 다락방이 시작되었다.
퇴원한 후에는 집으로 가서 하루에 3번씩 다락방을 했고, 교회로 인도 되었고 1년이 거의 지나도록 죽지 않고 살면서 큰아들과 며느리, 작은아들과 며느리, 여동생, 남동생, 언니, 친정 부모, 조카 등 모두 23명이 영접하고 교회화 되었다. 문복여 씨 한 분이 문이 되어 가정 가문 복음화가 일어난 것이다. 문복여 씨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계신다. 그동안 2번이나 암이 재발되고 전이 되었지만 또 다시 치유 받았다. 지금은 직장까지 다니면서 권사 직분까지 받았다. 그 후에 또 다시 문을 여신 현장도 암환자 현장인데 박용운 씨 현장이다. 대장암 말기 환자로서 복음 받고 아내, 아들, 딸 모두 다 복음 속으로 들어왔다.
경북 대학병원은 전국에서 환자가 모이는 곳이라 복음을 전하면 영접운동은 일어나지만 교회화가 되는 열매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것이 기도 제목이었는데 시간표가 되어 지역에 초점을 맞추어 전도운동을 하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병원사역에서 암환자를 붙이신 것처럼 지역 현장에서도 암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전도의 문을 열어주셨다. 정말 놀랍고 신기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기도를 드렸다.
나는 현장에서 가정 가문 복음화가 일어나는 것이 부러워서 하나님께 내 가정 가문에도 이 축복을 주셔서 복음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 어느 날 집에서 지역 일꾼들과 모여서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들어오더니 큰시누에게 문제가 생겨서 가봐야 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귀신이 들린 것 같다는 것이다. 가보고 전화하겠다는 남편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왔음을 깨닫고 무조건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꾼들과 함께 기도했다.
저녁에 큰 시누와 그 딸이 왔는데 두 사람 모두 귀신에 잡혀 있었다. 그 때 최영수 목사님께서 중국에 가시고 안 계셔서 집에 10일간 데리고 있었다. 귀신이 들려서 밤마다 잠을 안 자고 붕붕 뛰고 나는데 태권도 선수들보다 더 발차기를 잘했다. 밥을 차려주면 더러워서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다 섞어서 거기에 물 붓고, 정말 더러운 귀신의 짓이다 싶은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딸에게 들어간 귀신이 더 큰 귀신이어서 엄마를 때리고 차렷, 열중 쉬어했다. 그래도 시누이는 그대로 복종했고, 꼼짝 못하고 맞고 있었다. 이것을 보는 남편은 누나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영적인 실체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에게 조용히 구원의 길이 적힌 메시지를 주었다. 남편은 혼자 있을 때 성경을 찾아 읽어보면서 스스로 영접기도를 했다.
최영수 목사님이 중국에서 오신 후 교회 자모실로 옮기라고 말씀하셔서 옮겼고 교회에서 넉 달 동안 5인1조 팀들이 돌아가면서 매일 기도회를 했다. 나는 밥을 해서 갖다 주며 하나님께서 가정 가문복음화를 이루실 것을 믿고 기도했다.
그동안 남편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났고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결박 기도를 하자고 했더니 진짜 날뛰는 누나, 조카를 보고 결박기도를 했고 거품을 내면서 쓰러지는 것을 체험을 했다. 그래도 의심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또 다시 예수 이름으로 결박했더니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려고 하셨는지 계속 결박되는 모습을 확인시켜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표 속에서 시누이와 조카는 고통스러웠으나 시동생, 시누이, 큰 딸, 작은 딸, 아들, 시누이 남편 모두가 복음을 받고 복음 속으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고 남편도 같이 등록을 했고 그 날 최영수 목사님이 심방 오셔서 가문 전체에 복음을 선포하시고 영접기도로 신앙고백을 드리게 되었다.
남편은 누나, 조카의 일로 복음에 충격을 받고 제사가 다가오자 종손 큰형에게 찾아가서 다 불러 모아줄 것을 이야기 했고 제사 지내는 날 남편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고 자기는 더 이상 제사를 지낼 수 없음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집안 제사도 없애고 다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증거 했고 큰 시숙과 사촌 시동생 4명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날 당장 목사님을 모시고 가서 복음을 전했고 모두 복음을 받아들였고 제사는 중단되었으며 큰 시숙은 우리 교회로, 사촌시동생들은 가까운 친지와 교회로 연결되어 신앙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첫 명절 때 우리 집에 모두 모여 추도 예배를 드렸는데 큰 시숙이 나에게 성경책을 내밀면서 예배 인도할 것을 권해서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몇 년 동안 추도예배를 드리다가 지금은 추도예배도 드리지 않는다.
친정가문에도 복음화의 문을 여셨다. 친청 엄마가 건강이 나빠져서 넘어지고 친정 오빠는 공황장애라는 정신문제가 왔고 여동생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넘어지면서 복음이 계속 들어가게 되었다. 엄마는 건강 문제가 오기 전에는 성경책을 집어 던지고 찢고 나를 미쳤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오빠 부부와 동생 부부가 말씀 받는 것도 방해했었다. 결국 엄마의 방해로 동생부부와 오빠부부의 말씀운동은 중단 되었고 나는 기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엄마가 건강이 악화되어 뇌졸중으로 넘어지면서 의식이 없었고 엄마의 구원을 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더니 하나님의 응답으로 의식이 돌아와서 복음을 받고, 고백하여 1년 6개월 간 노인 전문병원에 입원해 계시면서 말씀을 계속 받았다. 엄마는 병원에 오는 동생부부와 오빠부부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딸이 되었으니 장례를 기독교장으로 해주고 제사는 지내지마라, 나처럼 살지 말고 교회가라고 자주 말씀 하셨다. 엄마의 소천과 장례식을 다 마친 후 그 주간에 가족 전체가 교회에 등록을 했고 그 날 최영수 목사님께서 심방하셔서 복음을 증거 하셨고 모두 복음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모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합숙을 다녀와서 신학원에 다니고 있다. 남편은 안수집사로 임직을 받았고 지금 신학원에 통신으로 강의를 듣고 있다. 시어머니는 명예권사직분을 받았고 여동생은 지금 전도사의 삶을 어떻게 사는지 고민하며 나에게 질문하기도 한다.
엄마가 소천 하시던 해에 최영수 목사님께서 교역자로 임명 할테니 전도사 고시를 칠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나의 연약함과 준비되지 못한 부분이 보여 고민했지만 전도사 고시를 쳐서 합격했고 그와 동시에 교역자로 임명을 받았다. 현장에서 전도운동 하는 것이 좋아서 계속 이 모습으로 살기를 원했지만 너무 준비되지 못한 채 전도사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 늘 마음의 한쪽에 있어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은 총회신학교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셨다. 우울증으로 죽기를 바라던 내가 구원을 받고, 전도자로 부름을 받아 어느 덧 총신에 앉아있다니 정말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귀한 교수님들과 귀한 전도자들과의 만남에 가슴이 벅차고 감동이 넘쳤다. 비록 공부를 내려놓은 지가 오래되다 보니 학업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사 감당케 하셨다.
그렇게 학부 4년을 마쳤고 어느덧 연구원 졸업반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삶이 안 되고 부족한 부분이 여전히 있지만 그때마다 전도자의 삶을 향한 일심 전심 지속에 복음 언약을 붙잡고 도전한다.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요 전도자라는 사실에 자부심, 자존심, 자긍심이 넘쳤던 바울처럼 중심도, 자세도 영성, 자질, 삶 모두가 바울처럼 준비되어 세워지고 싶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인도하심을 믿으며 오늘도 내 지역을 발로 걸으며 분석하며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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